PS(Problem Solving), CP(Competitive Programming), 알고리즘 문제 해결, 정보 문제풀이, 올림피아드 문제 풀이, …

이 분야를 지칭하는 표현이 여럿 있습니다. 보통

  • 문제가 주어진다. 이때 이 문제의 일부(실제로 계산해야 하는 수열, 그래프, 그림 등)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 그 문제를 해결하는 알고리즘을 생각해야 한다.
  • 알고리즘의 모든 과정을 실제로 구현한다. 위에서 말한 '문제의 일부'를 입력받아 문제를 푸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제출한다.
  • 몇 개의 데이터를 통해 채점하여 옳은가를 확인한다.

위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알고리즘 기반의 사고 능력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알고리즘 및 컴퓨터 프로그래밍 능력은 컴퓨터과학 및 컴퓨터공학에 속하고 이 이름이 정보과학이라는 이름과 교차해 쓰이기도 해, '정보과학'과 관련지어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정보올림피아드 혹은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서 출제하는 문제 역시 온전히 이 쪽이기 때문에 '정보 올림피아드 문제'로 대강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야의 모든 문제가 이렇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 문제의 일부가 모두 주어져 있는 경우. output-only라고 불리는 문제 종류가 그렇습니다.
  • 소스 코드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 2015년 즈음의 구글 코드 잼 대회가 그랬습니다. 작성한 프로그램을 실행한 결과를 제출했습니다.
  • 프로그램 전체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 grader 방식으로 불리는 문제 종류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이 요구하는 생각은 비슷하기 때문에 대체로 한 가지로 묶어 부르고는 합니다.

PS와 CP 간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 PS (problem solving, 문제 풀이): 그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문제를 푼다는 점에 주목한 표현입니다. 때문에 꼭 컴퓨터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한다는 법도 없지요.
    수학에서도 같은 용어를 사용합니다. 수학 올림피아드 등의 대회에 출제되는 문제도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일정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쪽 문제를 모아놓고 토론하는 유명한 포럼 사이트 Art of Problem Solving도 있습니다. 수학 PS가 프로그래밍 PS와 비슷한 점도 많습니다.
  • CP (competitive programming, 경쟁 프로그래밍): 이 분야의 문제 풀이가 많이들 대회 단위로 진행되고, 제한 시간 내에 더 일찍, 더 많이 푼 사람이 더 높은 등수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반대로 시간 제한 없이 느긋하게 생각하며 문제를 푸는 경우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표현이 거의 통일된 것 같습니다. 競技プログラミング(경기 프로그래밍), 혹은 줄여서 競プロ(きょうプロ라고 읽습니다)라는 단어인데, CP와 거의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중국에서는 심플하게 프로그래밍 대회(程序设计竞赛)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것 같고, 경쟁 프로그래밍(竞争编程)도 간간이 쓰이는 듯합니다.

저는 어느 용어든 좋지만 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블로그에서는 PS를 많이 사용하고자 합니다.

 

업솔빙 (upsolving)

대회가 끝난 후에 문제를 푸는 걸 말합니다. 풀이를 알게 된 후 그걸 코딩하는 경우에도 쓸 수 있고, 아니어도 쓸 수 있습니다.

 

문제 세트 (problem set)

문제 모음입니다. 보통 시간 잡고 대회를 치룰 수 있는 수준의 문제 모음을 말합니다. 혹은 특정 대회의 문제를 묶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APIO 2017 세트라고 하면 rainbow, merchant, koala 이렇게 세 문제를 말하겠지요.

한 문제 세트를 쭉 돌며 푸는 일을 '세트를 돌다' 혹은 '세트를 돌리다'라고 말합니다.

 

데이터 세트(data set), 테스트 세트(test set), 테스트 케이스(test case)

채점하는 데 사용하는 파일을 의미합니다. 테스트 케이스 하나하나는 각각 한 번씩 채점을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고, 그런 케이스가 모두 묶인 것이 데이터 세트 혹은 테스트 세트입니다.

 

정보 올림피아드(Olympiad in Informatics, OI)

먼저 국제정보올림피아드(International Olympiad in Informatics)가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선발한 국가대표가 매년 한 곳에 모여 치루는 PS 대회입니다. 1989년에 처음 개최되었고, 2019년 대회가 31회차입니다. 우리나라는 4회차인 1992년에 김하진 현 아주대학교 명예교수님이 이끄는 대표팀이 참가한 이래 늘 훌륭한 성적을 내고 있으며, 2002년에는 용인에서 대회를 주최하기도 했습니다. IOI에 관한 세세한 기록은 모두 IOI statistics (링크) 페이지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런 틀을 따릅니다. 

  • 매년 국가당 4명의 대표
  • 일주일 간의 대회 기간 중 하루 걸러 하루씩 두 번의 대회 (이외에는 관광 및 행사)
  • 각 대회당 5시간 3문제, 각 문제당 만점 100점
  • 대회 중에는 다른 참가자의 점수나 현황을 알 수 없음
  • 동점자는 같은 성적으로 간주

그리고 여기서 설명하는 모든 정보 올림피아드, 줄여서 OI들은 형식이나 문제 유형이 비슷합니다. 문제 유형이 공통적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OI 스타일'로 묶어서 지칭할 정도니까요. 기본적으로 난이도가 있고 푸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여러 단계에 걸쳐 생각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또한 플로우나 FFT 등 스스로 생각해 내기 지나치게 어렵고 학습 여부에 따라 성적이 크게 달라질 만한 개념은 출제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IOI는 출제 가능한 문제의 범위를 명확하게 문서화해 공개하며 이 문서를 IOI의 실라버스(syllabus)라고 부릅니다.

문제의 서브태스크가 세세하게 나뉘어 있어 만점 풀이를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부분 점수를 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모은 점수가 때로는 문제 하나를 완전히 푼 것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문제를 모두 풀어 300점을 받지 않는 이상 등수도 이 부분 점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찬찬히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서브태스크를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생각을 조금씩 발전시켜 나갈 수 있고, 만점 해법에 도달하기가 더 쉽습니다. 출제자들이 서브태스크를 통해 힌트를 주는 셈이지요.

세계 각국마다 무슨무슨 OI 하는 식으로 OI가 있으며 보통 각 나라의 IOI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데에 많이 쓰입니다. IOI는 출전 범위가 대충 말해 고등학생 이하(대학교육 미이수자)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OI가 비슷한 수준으로 참가 자격을 제한합니다. 그래서 고등수학에서 흔히 나오는 '이 내용은 고등학교 수준을 벗어남' 같은 표현을, IOI에 출제되지 않는다고 명시된 개념들(플로우나 FFT 등)에도 농담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고등학생으로서 몰라도 되는, 고등학생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내용인 셈이라 그렇습니다.

ICPC 등의 대회와 다르게 스코어보드는 참가자 본인에게는 비공개로 진행됩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에 시간을 쓰는 대신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또 같은 점수를 받은 참가자 간에 제출 시간이나 횟수 등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같은 성적으로 시상합니다. 그래서 틀리는 걸 걱정할 필요 없이 여러 번 제출해도 되지요. 할 수 있는 최대한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어딘가 열정적이고 멋진 느낌이 있습니다.

국가 단위 OI 문제의 출제자는 나라를 불문하고 많은 경험과 이론적 기반이 있는 사람들이 맡는 듯합니다. 쉽게 말해 교수님들이 많습니다. 교수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그 나라 내에서 최고 수준인 사람들이 맡는 건 맞습니다. 때문에 OI라고 하면 어느 정도 퀄리티가 보장되어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많이 알려진 OI가 몇 없네요. 이 글에서는 보장된 퀄리티의 OI 몇 개만 소개하기로 합니다.

 

한국정보올림피아드(Korean Olympiad in Informatics, KOI)는 1984년 제1회 전국PC경진대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최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IOI도 5년이나 앞서네요. 당시에 어땠는진 모르지만, 1996년 한국정보올림피아드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후 2019년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이 대회의 문제 스타일도 IOI와 비슷합니다. 특이한 점은 4시간 4문제로 IOI보다 시간은 짧고 문제는 많습니다. 대신 문제가 난이도 순으로 주어집니다. 또한 IOI와 다르게 동점자 간에는 제출 횟수 그리고 마지막 제출 시간으로 순서를 가릅니다. 국무총리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등 등수에 따라 시상이 걸려 있는데, 이런 상의 갯수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서 그렇다네요.
초등부, 중등부, 그리고 고등부로 나뉩니다. 비교를 하자면 IOI는 고등부 전국대회의 어려운 문제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예전에는 전국대회를 매년 서로 다른 곳에서 개최해 전국을 순회했습니다. 천안, 춘천, 인천, 순천 등이 기억납니다. 그러다 최근 몇 년동안은 경산 경일대학교에서, 그리고 작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진행했습니다. 최근 KOI가 격변을 겪고 있는데, 지금 쓰기에는 피곤해서 나중에 쓸 것 같습니다.

 

일본정보올림피아드(Japanese Olympiad in Informatics, JOI)도 있습니다. 3시간 6문제의 예선과 4시간 5문제의 본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난이도순입니다. 12월에 예선, 2월에 본선이 치뤄지며 본선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은 3월(일본은 방학입니다)에 진행하는 봄 합숙(春合宿, 영어로는 spring camp로 많이들 부릅니다)에 참가해 무려 4일 연속으로 매일 5시간 3문제 대회를 치룹니다. 만점 1200점 기준으로 상위 득점자 4명을 추려 국가대표로 선발합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JOI 본선은 쉬울 수도 있지만, 이 봄 합숙 문제는 상당히 어렵고 그래서 공부하기도 좋습니다. 2016/2017 시즌 합숙부터는 일본어와 함께 영어 문제도 공개하고 있어 공부하기 훨씬 편해졌습니다. AtCoder에 대부분의 봄 합숙 문제가 채점 가능하게 업로드되어 있고, oj.uz에도 대부분 올라와 있어 어느 쪽을 쓰셔도 무방합니다.

 

폴란드 정보올림피아드(Polish OI, POI)가 있습니다. 역시 문제의 질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짧아서 이해하기는 쉽지만 풀기는 어려운 그래프 문제를 잘 낸다는 개인적인 인상이 있습니다. 물론 그래프가 아닌 어려운 문제도 많습니다. 백준 온라인 저지(BOJ)에 많이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발칸반도 정보올림피아드(Balkan OI)가 있습니다. 여기 문제도 좋습니다. 백준 온라인 저지(BOJ)에 많이 업로드되어 있습니다.

발트해 정보올림피아드(Baltic OI)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위의 발칸보다 약간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둘 중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낫다고 꼽는데 그게 어느 쪽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발칸 반도와 발트 해 모두 BOI로 축약 가능해서 저는 늘 헷갈리네요. BkOI, BtOI 처럼 줄이면 나을까 싶긴 한데 이렇게 줄이는 건 본 적이 없네요.

중부유럽 정보올림피아드(Central European OI)가 있습니다. 이쪽도 문제가 훌륭합니다.

이외에 OI의 성격을 띄지만 이름이 OI가 아닌 대회가 몇 있는데, 따로 분리해서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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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에게 옆자리에서 직접 듣는 이야기라 더욱 생생했을까요?

포레스트 검프는 발달 장애를 가진 어린 아이이다. 다리에 교정기를 차고 걷던 검프는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다가 달리기에 재능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재능 덕에 대학에 입학 및 졸업하고, 졸업식에서 입대를 제안받아 입대하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고, 전쟁 중 우연히 엄청난 탁구의 재능을 찾아 결국 핑퐁 외교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가족이 새우잡이에 종사하던 전사한 전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대 후 새우잡이 배를 구입해 어업을 시작하고, 태풍에서 이 배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떼돈을 벌게 된다. 어머니의 병환 소식으로 고향에 돌아온 검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첫 친구였던 제니와 다시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제니가 떠나고, 검프는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한다. 3년동안 이어진 달리기 끝에 피곤하다며 집으로 돌아온 검프. 시간이 흐른 후 제니의 편지를 보고 그를 찾아간 검프는 자신의 아들을 만난다. 제니가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검프가 아들을 스쿨버스에 태우는 장면으로 영화는 맺는다.

 


 

글로 다 요약하지 못할 만큼 참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중심 사건이 있지는 않고, 검프의 일생의 여러 일을 그리는 영화였습니다. 여러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드라마였다면 그렇게 검프의 일상을 언제까지고 그려나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 드라마에서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스토리를 가지고, 드라마 전반의 스토리는 배경과 캐릭터를 위해 필요합니다. 반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서사,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장면마다 변하는 것, 그리고 모든 장면을 관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있겠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영화 전체에서 나타난 주제는 강한 의지, 끈질긴 생명력이었습니다.

검프는 주변의 일 대부분에 무덤덤해 보입니다. 입대 후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목숨이 오가는 폭격 속에서 친구를 잃어도, 두 다리를 잃고 비관에 빠져 엉망이 된 댄 중위를 만나도, 제니가 버스를 타고 떠날 때에도, 슬픔은 느끼지만 슬픔에 빠져 힘들어하고 흔들리는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터치다운을 하고 탁구로 국가대표가 되어도, 새우잡이로 떼돈을 벌어도, 댄 중위가 다시 갱생해 자신을 찾아왔을 때에도, 이 사람이 기쁘기는 한지 분간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너무 기뻐하지도 않고 너무 슬퍼하지도 않으며 검프는 삶의 모든 면을 견뎌냅니다. 그야말로 온갖 사건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꿋꿋하게요. 그런 꿋꿋한 모습은 영화의 어느 순간에도 빠지지 않고, 시간과 사건을 나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검프 어머니의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 (삶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20세기 미국사를 한 장면도 빼놓지 않고 발맞추어 나아갑니다. 여기에도, 여기에도 검프가 참가했단 말이야, 하는 놀람은 수없이 반복되면서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애매하게 인용하느니 오히려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주입했고 또 성공한, 영락없이 코미디 영화스러운 요소입니다. 반면에 어딘가 찜찜하다는 느낌은 혹시 안 드시나요? 억지로 집어넣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요. 어떤 캐릭터가 납득이 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완성된 서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사의 수많은 장면을 세세하게 끼워넣은 검프라는 캐릭터를 자연스럽지 않게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분재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철사에 묶여 정해진 대로 이리저리 굽어나가며 자라듯이요.

그런데 어쩌면 부자연스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코미디 요소를 잠시 배제하고 볼까요. 시대 배경을 알려주고자 했다면 중간중간 라디오나 신문, 그리고 TV를 사용해 알려주거나, 검프의 내레이션을 삽입하면 됐을 일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검프가 온갖 사건을 넘나들며 역사를 바꿉니다. <닥터 후>에서 역사에 접근할 땐 그 내용이 에피소드 단위로 휴먼 드라마나 SF 중 하나로 귀결되고 시간 여행은 수단에 머무는데, <포레스트 검프>는 어떤가요? 훨씬 주도적인 역할로, 역사를 그야말로 써 나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검프는 어쩌면 여기서 검프가 아닌 셈이에요. 최고로 불린 앨러배마 대학교의 미식축구 선수들, 베트남전에 참전한 수백만 명의 미군, 핑퐁 외교로 공산 체제 중국을 미국인으로서 처음 방문한 아홉 명의 탁구 선수, 반전 시위에서 연설하는 군인, 달리기로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 검프는 그들 모두를 대신해 역사를 써내려가는 캐릭터이고 결국 이들을 상징합니다. 역사는 더이상 검프라는 두꺼운 책에 겹겹이 꽂힌 책갈피가 아니라 검프라는 책의 내용 그 자체입니다. 동시에 같은 시대를 겪어온 미국 사람들 모두가 가진 삶에 대한 의지, 힘든 일을 이뤄내며 역사를 쓴 자신들, 20세기 미국인 자체를 검프에 비추어볼 수 있습니다. <국제시장>이 이렇다고 많이 들었는데 아직 보지 못해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없네요.

 


 

검프는 그렇듯 상징적 인물이 됨과 동시에 주변적 인물이 됩니다. 검프는 가장 유명하지만 동시에 가장 일반적이고, 그래서 가장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정류장 옆 자리에 앉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검프를,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삼 년을 내리 달리기만 했던 인물을 알아보는 이가 없을까요? 영화 중반까지 검프는 꾸준히 제 이름은 포레스트, 포레스트 검프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정말로 검프라는 한 명의 사람을 분리해 보게 되기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댄 중위나 제시 같은 가까운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새로운 생각을 얻고, 검프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해갑니다. 끔찍했던 인생에서 스스로를 구원해내며 각자의 시간을 살아나가지요. 군인 검프, 탁구선수 검프, 달리는 농부 검프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을 거예요.

하지만 그동안 검프는 늘 주변적인 인물에 머무릅니다. 검프 자신의 이야기는 결국 제니와 연관해 시작합니다. 검프는 제니만큼은 완전히 놓지 못하고 계속 떠올리고 힘들어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제니의 방황을 멈추고 설득하고 사랑을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검프가 무작정 달리는 장면도 실은 앞뒤 맥락이 이어지지 않아 부자연스럽지만, 그 시간을 통해 영화가 검프 한 사람에게 초점을 옮겨 왔다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 당시에 모금을 위한 달리기가 붐이었는지도 모르겠고, 겸사겸사 smiley도 넣고 싶었을 수도 있고, 어린 포레스트가 클 때까지 영화 상의 시간을 벌어야 했을 수도 있고 하는 등 적당한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보다는 조금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온갖 사람들이 검프를 좇아 따라왔습니다. 검프로부터 희망을 얻고, 그의 의지를 느끼고 감화되었죠. 삼 년, 달리기로 치면 평생이나 다를 바 없이 느낄 삼 년 동안 검프를 따라온 이는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검프는 자신을 따라오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드디어 집에 가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을 조명해 온 역사의 기록으로부터 이제야 벗어나는 거지요. 실은 늘 모든 게 그렇게 검프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거든요. 검프가 자신이 된다는 이야기에서 달리는 내내 줄곧 제니를 생각했다는 영화 속 대사도 겹쳐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제니도 참 20세기 영화다운 캐릭터네요.

 

다리를 잃은 댄 중위의 장면에서 어떤 특수 효과를 사용했는지 궁금했는데, 로토스코핑 등을 이용해 필름 단위로 편집을 거쳤다는 글이 있네요. 침대에서 떨어지는 등 동적인 장면도 있어 크로마 키도 아니었을 것 같았는데,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뉴스 속 장면들 역시 그런 방법으로 편집했다네요.

발달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그리는 방법은 '답답하지만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가장 간편하고 결국 나이브하겠습니다. <아이 엠 샘>은 어려운 주제를 너무 간편하게 다뤘다는 평이 기억에 남는데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그런 진지한 고려는 느껴지지 못했습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으로 <아이 엠 샘>의 샘 역할을 맡은 숀 펜은 이 영화에서 제니 역을 맡은 로빈 라이트와 한동안 결혼했었네요.

stupid is as stupid does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handsome is as handsome does라는 표현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숙어의 어조는 얼굴이 잘생겨야 잘생긴 것이 아니라, 행동이 고와야 잘생긴 것이라는 표현으로, 외모가 아닌 행동을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외모가 아닌 행동이 어정쩡함을 보고 묻는 사람에게 '행동이 바보같아야 바보이지요' 하고 대답하면 말 그대로 360˚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아무런 지혜도 없는 말을 한 셈이네요. 원래 표현을 알고 나서야 이해가 가서 덧붙여 적어 봤습니다.

검프도 그렇고, 댄 중위와 제니, 백인 요리사의 새우 요리를 즐기는 버바의 어머니까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느끼게 됩니다. 요즘 모든 작품에서 같은 느낌을 받네요.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하고 애틋한 시선. 이 영화는 그런 시선이 주가 되지는 않지요. 다음에는 그런 영화에 대한 글도 쓰고 싶습니다.
감상 후 열흘이 지난 이제야 마무리합니다. 글을 쓰는 게 참 오래 걸리는 일이구나 싶어요. 다음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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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군수산업의 독보적 1위에 군림하는 기업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후계자 토니 스타크가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조직에게 납치된다. 이들은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신제품인 제리코 미사일을 똑같이 만들어 주면 풀어주겠다고 말하며 스타크는 이들에게 공학 설비와 재료를 제공받는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것은 각종 화기와 추진기가 달린 강철 갑옷이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고 구조된 스타크는 앞으로 무기 개발 산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한다. 한편 스타크의 납치, 그리고 살해까지 계획했던 이가 있었으니, 스타크의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부사장인 오베디아 스탠이었다. 그는 스타크가 탈출에 사용한 강철 갑옷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새로운 갑옷을 만들어 군수업계를 완전히 집어삼키고자 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무력을 다툰 끝에 오베디아가 사망하며 마무리되고, 그 과정을 지켜본 시민들도 '아이언 맨'을 똑똑히 기억하게 되었다.

 


 

한동안 <어벤저스: 엔드게임> 얘기를 안 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개봉이 저는 정말 엊그제같은데 벌써 만으로 1년이 넘었다네요. 수 년에 걸친 MCU 영화가 이제 커다란 끝을 맺는다고 하니 괜한 아쉬움과 호기심도 더 생깁니다. 한편으로 CGV의 어느 극장에서 <엔드게임> 상영관 확보를 위해 이미 예매가 되어 있던 <미성년> 상영 회차를 강제 취소했다는 황당한 소식도 있었습니다.
저는 좋은 계기로 그 1년 동안 독립영화관, 예술영화, 이렇게 불리는 곳과 작품을 열심히 보러 다녔어요. 영화를 보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가 많이 좋아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차례차례 개봉 소식이 들려오는 '히어로 영화'가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지더라구요. <엔드게임> 개봉을 맞아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동시에 <어벤저스> 시리즈의 프로모션을 올리기에, 이런 가볍다는 선입견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한 번 제대로 보고 나서 평가해 보자는, 약간은 팔짱 낀 시선으로 MCU 영화들의 감상을 시작했어요.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고,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본인은 그에 별 개의치 않아 하는 토니의 캐릭터는 너무나 넉넉하게 클리셰입니다. 이런 남성 캐릭터에게 선망을 품는 사람들도 참 유감이지만 있더라구요. 어린애처럼 고집이 강하고 모든 걸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고, 주변 사람들이 그걸 받아주기 때문에 결국 늘 관철하고 말아요. 천재적인 수학·과학·공학 실력도 있지요. 그의 행동과 대사에 익숙해지고 나면 예측하기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니의 수많은 배려심 없는 행동들도 처음 봤을 땐 재미있었겠지만요, 재치란 느낌은 사라지고 무례함만 다가오게 되기가 금방이었습니다. 반대로 적잖은 '능청'이 필요한 토니의 연기를 완벽히 보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인상깊었습니다. 그런 토니의 행동을 로즈와 포츠, 그리고 스탠은 받아내며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초중반까지는요.

스탠의 범행 동기는 회사의 수익, 권력욕, 혹은 둘 다인 것 같습니다. 토니의 든든한 파트너이자 의지할 인물처럼 보이던 스탠의 모습은 자신의 수트를 입은 후 도로 위를 날뛰며 폭력을 휘두르는 후반 모습과 극렬하게 대비합니다. 그 대비가 솔직히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스탠은 그 덕분에 의심의 여지 없이 메인 빌런의 자리에 올랐지만, 토니를 미워하고 권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물로 전락한 과정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관객은 이제 명백한 악인이 생겼으니 그를 미워하고 반대로 토니를 응원하면 됩니다. 이보다 조금 더 복잡했다면, 조금 더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면 낫지 않았을까요?
Ten Rings는 아프간의 테러 집단의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한 것 같지 않나요? 이들도 참 이유 없이 폭력을 좇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보는 사람이 가진 스테레오타입에서 꺼내올 수밖에 없구요.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악의 역할인 인물 혹은 세력이 등장하고, 가까운 사람의 위험이나 죽음으로 인해 주인공이 각성하고, 빌런을 극복하면서 정의롭고 영웅적인 '히어로'가 되는 스토리는 장르의 문법인가봐요. 그렇다면 아마 비단 <아이언 맨>뿐만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모든 영화와 만화, 소설 등의 작품에서 차근차근 발전시켜 온 문법일 거예요. 그래서 이런 구조를 <아이언 맨>의 평가 요소로 놓을 수는 없겠어요. 무엇보다 이 <아이언 맨>은 MCU의 첫 영화이자 캐릭터를 명확히 그리고 인상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작품이었을 테니까요. 콜슨 요원이 얼굴도장만이라도 찍으려는 듯이 자꾸 등장하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토니와 포츠 사이의 감정 변화는 드러나게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연심이 그리기 쉬운 주제도 아니니 그러려니 싶습니다. 반면에 토니의 태도 변화, 즉 탈출 이후에 완전히 반전 태도를 가지게 된 점은 생각해 볼 만해요. 자신의 생각에 대해선 놀랍도록 과묵한 캐릭터니 추측할 수밖에 없겠어요. 토니는 무엇을 깨달은 걸까요? 무기가 무고한 민간인을 제압 및 사살하는 데에 쓰인다는 것, 무기의 발전은 분쟁 지역의 혼란을 가중하고 다층화할 뿐이라는 것 등도 떠오르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무기는 사람을 해치고 아프게 하는 가장 순수하게 악의적인 도구잖아요? 그 악의를 몸소 느꼈기 때문에 토니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방금까지 같이 사진을 찍던 군인이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도했고, 본인도 끔찍하게 공격적인 무기에 맞았구요. 납치와 개발 명령 같은 건 어차피 따를 생각이 없었으니 크게 중요하지 않고요. 그들이 쌓아두고 있던 무기 역시, 판매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한참 뒤였으니 그저 나포했다고 생각했을 테고요. 민간인 피해에 대한 뉴스를 보고 벌떡 일어나 도우러 나간 것도 인센 박사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선을 행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순수한 악은 행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상상했구요, 영화속 묘사는 전혀 다릅니다. 무기 개발 중지 발표 당시 토니의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I saw young Americans killed by the very weapons I created to defend them and protect them. And I saw that I had become a part of the system that is comfortable with zero accountability. (...) I came to realise that I have more to offer this world than just making things that blow up."
"우리 미국인을 지키기 위해 만든 무기로 인해 바로 그 젊은 미국인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몸두고 있는 이 시스템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목격했구요. (...) 제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게 펑펑 터지는 것들을 만들기보다 더 많이 있을 거란 걸 깨달았습니다." 로 의역합니다.
Americans, 미국인이라는 언급은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의 유명한 애국심을 연상시킵니다. 그 애국심이 국방으로, 국방이 무기 및 방위산업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토니는 한 발 나아가서 그 무기들이 거꾸로 자국의 군인을 향할 때의 책임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무기 개발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토니 옆에 박힌 미사일에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로고가 똑똑히 적혀 있는 장면은 개그 신처럼 정말 순식간이지만 이렇게 보면 의미가 큽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무기가 우리 군인을 죽인다는 점을 깨닫는 지점이거든요.
저는 그런데 이런 생각이에요. 자국 군인을 죽이는 건 싫지만, 적군은 상관 없던 걸까? 이게 모순적이라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토니가 애국자에 가깝다면 저는 조금 더 인본주의자에 가까운 생각을 해봅니다.

 

하늘을 가르는 아이언 맨 수트는 조금 밋밋했지만, 수트 조립 같이 CG 효과가 화려했던 몇몇 장면은 기억에 남아요. 다 본 후 개봉 연도를 찾아보고 오히려 놀랐어요. 2008년의 기술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네요. <아바타>도 이듬해인 2009년에 개봉했었다고 합니다. 벌써 10년이나 됐다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요즘 나오는 영화에서도 비행하는 물체들은 어쩜 그렇게 어색한지 모르겠어요.

본 기억이 있던 <아이언 맨>은 다시 찾아보니 <아이언 맨 3>였습니다. 토니의 캐릭터가 뻔하게 느껴졌던 건 <어벤저스> 뿐만이 아니라 자체 시리즈에서도 한 작품을 본 후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처음에 언급했던 '팔짱'을 풀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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