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와 함께하는 2021 교향악축제-광주시립교향악단(4.20)

2021. 4. 21. 03:45문학과 예술/음악

교향악축제 포스터.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이었습니다. 이 협주곡을 언제 한 번 들은 것도 같았는데, 지난 2019년 여름 광주여성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창단 20주년 기념음악회였나 봐요. 그 날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도 같이 연주한 날이었습니다. 이번에 묶인 쇼스타코비치 5번도 차이코프스키 5번만큼이나 극적인 내용과 결말을 가진 곡이지요. 저는 쇼스타코비치 5번의 모든 악장을 좋아해요. 2악장은 거칠지만 익살스러운 점이 같은 작곡가의 교향곡 제1번을 닮은 것 같아요. 3악장을 피아노로 연주하거나 첼로 파트만 연주해 보기도 하는데 이 악장도 정말 좋은 곡이에요.


호른의 강렬한 B♭ minor (내림나단조) 선언은 시원시원했고 뒤따르는 퍼스트 바이올린-첼로의 멜로디가 귀를 번쩍 뜨이게 했어요. 이번 광주시향 공연은 관객 시선 좌측으로부터 퍼스트-세컨드-비올라-첼로 순서로 파트를 배치했습니다. 저는 우측에 앉았기 때문에 양 바이올린이 피아노 너머에 놓여 있었는데도, 바이올린이 놀랍도록 선명하게 들렸어요. 음량도 크고, 음색이 굉장히 밝았어요.

협연자와 오케스트라가 호흡을 잘 맞춰서 크케 엇갈리게 들린 순간은 없었어요. 리허설 넘버 7에선 피아노가 조금 급했고, 넘버 10에서는 정박의 피아노, 2분음표로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관악, 그리고 엇박으로 놓인 바이올린의 리듬이 합쳐져서 잠깐 제어가 안 되지요. 그렇지만 넘버 9에서의 목관 앙상블은 아주 예뻤고, 넘버 16의 피아노 소리가 딱 제가 좋아하는 그대로라 행복했어요. 목관 정말 탄탄해요! 넘버 10에서 말한 바이올린의 엇박 리듬은 "E♭-F-G-E♭, F-G-A♭-E♭" 이 모양을 말해요. 처음 들을 땐 이 모양으로 분절이 되지만, 한 박자 당겨 놓아도 상승하는 음형이 돼서 말이 되거든요. 넘버 17 즈음부터는 바로 그 점을 이용해 헷갈리고 재미있는 리듬으로 긴장을 쌓아 가요. 여기는 좋았어요. 같은 리듬으로 넘버 23에서 살짝 무너진 건 다시 아쉬웠지만요.

3악장 초반엔 굉장히 실망했어요. 오케스트라와 협연자 모두가 밋밋했어요. 파트 별로 기술적 완성도는 높은데, 프레이즈가 거의 살지 않고 편평해졌어요. 셈여림을 조금 더 과격하게 줘서 밀고 당기는 맛이 있게 연주하면 어땠을까요? 악보에 셈여림이 안 적혀 있을 때 하는 '기본 셈여림'을 계속해서 연주하는 것 같았어요. 뭘 표현하려는 거지? 넘버 55에 일제히 떨어지는 음형이 네 번 반복되는데 마지막의 바이올린이 상당히 뭉개져서 들렸구요. 3악장 마지막, 넘버 67-68 사이에 아첼레란도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이건 정말 새롭고 좋았어요.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거든요. 어떻게 호흡이 이렇게 잘 들어맞지?

손정범 협연자 분의 연주는 좋았어요. 셈여림의 조절 폭도 넓고, 크레셴도 하나를 일직선적으로 가는 법이 없이 깊이 공부해서 연주하는 느낌이었어요. 애드리브 패시지가 잦은 곡인데 이게 연주자마다 템포가 정말 크게 다르잖아요? 이 분의 연주는 제가 좋아하는 템포에 꼭 맞아서 편안했고 기뻤어요.

그리고 악곡 내내 팀파니! 아낌이 없어요. 바이올린의 쨍한 소리와 더불어 공연 내내 변하지 않은 광주시향만의 음색으로 기억에 남았어요. 보통 듣던 것보다 배는 세게 들리는데 그렇다고 다른 소리를 다 잡아먹지도 않고 울림이 한참 남지도 않아요. 터질 듯이 울려대는 팀파니는 이후 교향곡이 주는 특유의 벅차오름을 배가해 줬어요. 팀파니는 다다익선이다!


교향곡 1악장의 문을 여는 첼로-베이스의 멋진 감6도 화음은 비장하다는 단어 하나론 부족하죠. 그런데 맙소사, 겨우 여섯 마디 째부터 실망하고 말았어요. 앞선 협주곡의 3악장과 같은 이유로요. 퍼스트 바이올린의 셈여림이 정말 날것 그대로였거든요. 리허설 넘버 6 직전엔 하프가 등장하는데, 이번엔 좋은 방향으로 화들짝 놀랐어요. 하프가 한 대뿐인데 이렇게 선명하고 정확하게 들리다니! 지난 주의 말러 6번과 비교를 안 하기가 어려웠어요. 물론 이 곡에선 하프가 전반적으로 조용한 패시지에 많이 쓰이고, 지난 주에 들은 말러 6번이나 시벨리우스 1번은 오케스트라 혹은 현악의 튜티에서도 하프를 장식적으로 종종 기용합니다.

피아노 등장 직후 넘버 17에서의 극저음의 호른, 넘버 27에서의 트럼펫 등 관악 표현은 완벽했어요. 박수 갈채 속에 트럼펫을 일으켜 세웠을 때 이 패시지가 생각이 날 정도였어요. 넘버 32에서 넘버 36까지는 거대한 아첼레란도 및 크레셴도가 있어요. 현악이 악장 인트로의 음형을 서둘러 연주하고 있으면 금관이 계속해서 그 앞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마치 둘이 갈등하는 것 같아요. 금관이 계속해서 억누르려 들지만 현악이 끈질기게 옮겨 다니며 저항하고, 그렇게 부풀어 오른 오케스트라가 폭발하고 나면 현악이 목이 터져라 노래하는 장면이 이 악장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이 부분의 표현이 정말 좋았어요. 오케스트라 전체가 한 몸으로 움직였어요!

2악장은 아마 공연을 지켜 본 모든 분이 언짢은 마음을 가지고 출발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연주는 훌륭했어요! 가벼운 리듬 탓에 익살적인 느낌이 먼저 다가 오는 곡이지만, 들을 수록 신랄하고 조소적이며 염세적인 분위기가 녹아 있어요. 악장과 플룻의 짧은 솔로는 표현이 귀엽고 좋았구요, 실로폰이나 심벌의 타이밍이 말 그대로 완벽한 것도 잊을 수가 없어요.

Largo(라르고, 느리고 장중하게)의 빠르기가 적힌 3악장. 아, 이 곡을 현장에서 듣게 되다니요. 현악 앙상블이나 하프 위에 나지막이 깔리는 목관의 솔로는 차분하고 몹시 서글퍼서 저는 눈물이 났어요. 하프의 소리가 굉장히 선명하고, 파트 별로 음량이 정말 잘 조절돼 있어서 다들 선명히 들려요. 특히나 이 악장은 양 바이올린 파트를 합친 뒤 다시 셋으로 나눠서, 서드 바이올린까지 기용하고 있는데요. 원래는 퍼스트 바이올린이 7풀트인데, 그중 5풀트만 퍼스트로 쓴 걸로 보였어요. 이런 식이면 자칫 우왕좌왕하거나 소리가 묻히기도 쉬웠을 텐데 대단했어요. 이 악장의 하이라이트인 넘버 89에서는 바이올린, 첼로, 실로폰 모두가 선명히 들리죠. 첼로가 F5 음까지 올라가면서 흔들림 하나 없던 것도 기억 나요. 악장의 끝에선 첼레스타의 물구슬같은 소리가 선명히 울리고, 스산한 분위기로 F# major 코드가 울리는데, 녹음에서 들은 연주보다 훨씬 여리게 가져가길래 의아했어요. 여기를 무언가 곧 벌어질 듯한 느낌으로 연주한 뒤, 4악장을 아타카(attaca, 사이에 쉼이 없이 이어서)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이 연주에선 충분히 뜸을 들이고 넘어갔어요. 저는 이 편이 더 좋아요. 사실 아타카로 이으려면 충분히 이을 수 있었을 거예요. 베토벤 교향곡 제5번과 같은, 침묵으로부터 개벽을 이끌어내는 아타카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잖아요. 혹은 직접 채우지 않더라도 3악장의 마무리를 F# major가 아니라 D minor로 놓았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러지 않았잖아요. F# major는 온전히 3악장에 속해서, 3악장을 장식하는 마무리로서도 훌륭하게 기능해요.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의 2악장이 돌고 돌아 C# major로 마무리되는 장면도 떠오르구요. 4악장과 이어졌을 때의 느낌은 극대화되고, 그래서 4악장이 포르테(f)에서 포르티시시모(fff)로 커지는 마디 하나를 앞세운 걸지도 모르지만, 이걸 거의 아타카처럼 연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4악장은 첫 번째 주제에서 E major의 팡파레가 나오는 넘버 110까지의 속주가 정말 좋았어요. 일사불란이 곧 생명인 패시지인데 오케스트라 전체의 통합도 완벽하고 음량 분배도 좋았구요. 넘버 129의 호른의 C minor 솔로가 현악을 가르고 나오는 부분이 너무 쨍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트럼펫, 심벌, 팀파니 등, 무대 뒤쪽에 놓인 어택이 큰 악기가 딱 맞는 순간에 나와야 하는 장면이 4악장 후분에 상당히 많은데, 이런 걸 이렇게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히 처리하는 연주는 처음 봤어요. 지휘가 제스처를 세세하게 넣는 스타일도 아닌데도요.

금관 대편성은 아니지만 분위기나 리듬이 무거운 곡이라서 금관이 늘어지거나 밀리기 쉬운데, 호른과 트럼펫부터 튜바까지 모두들 날렵하고 힘있는 모습을 보여 줬어요. 플룻도 정말 잘 해 줬고, 바순도 칭찬을 아낄 수가 없어요. 베이스는 일곱 대 정도 있던 걸로 기억해요. 훌륭했는데, 협주곡인지 교향곡인지 어느 피치카토 패시지에서 활이 부딪히는 듯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난 건 아쉬웠어요. 명확하게 들리는 하프의 선명함은 마스터링을 거친 음반을 듣는 듯했어요. 팀파니, 심벌, 베이스와 스네어 드럼은 전 오케스트라와 완벽히 호흡이 맞아서 탄성이 나왔어요.

교향곡에서 전반적으로 마음에 걸린 점을 짚자면 현악 파트의 소리 지속이겠에요. 음을 내는 순간엔 완벽한 셈여림과 타이밍을 선보이지만, 그 음을 붙잡고 있는 동안 소리가 밍숭맹숭해져요. 부드럽게 시작한 음이든, 세게 긁은 음이든. 프레이즈 전체가 하나의 음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느낌이 종종 들었어요. 이건 지휘자 분이 잡아 주실 부분이었을까요?

전반적으로 좋은 공연이었어요. 쇼스타코비치 5번을 직접 들을 기회는 평시같아도 많지 않으니 행복했구요. 지휘자 분이 취임하신 게 최근이라 들었는데, 광주시향과 함께 할 앞날이 더욱 기대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