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서울시향 오스모 벤스케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1번

2021. 4. 16. 02:31문학과 예술/음악

공연 포스터. 버르토크, 춤 모음곡 (Béla Bartók, Dance Suite); 페테르 외트뵈시, 말하는 드럼 (Peter Eötvös, Speaking Drums, Four poems for percussion solo and orchestra); 시벨리우스, 교향곡 제1번 (Sibelius, Symphony No. 1 in E minor op. 39).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 타악기 박혜지, 2021. 4. 15. (목) & 16. (금) 8PM 롯데콘서트홀.

롯데콘서트홀은 테라스가 있어서 좋아요. 한강이 멀찍이 보이고 옆에는 웬 괴이한 기둥이 껌뻑이는데 그 옆은 서울의 지붕들로 다시 훤히 트여 있어요. 갑갑한 건지 개운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잠깐 숨을 돌리고 시간을 때운 뒤 다시 호화스런 실내로 향하면 어느새 공연 시작 시간이 돼 있어요. 서울시향-오스모 벤스케는 지난 2020년 여름에 시벨리우스 5번을 하려다가 베토벤 1번으로 바꾼 적이 있어요. 벤스케의 시벨리우스 전집은 좋아해요. 공연은 어떨까, 기대를 많이 했어요. 2021년 4월 15일 목요일 공연을 감상했습니다.

1부의 바르토크는 무난했어요. 소리를 좀 더 극단적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원래 약간 기묘한 맛이 있는 곡이니 조금 재밌게 연주할 수도 있는데, 정확하고 섬세하게 연주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저는 그게 서울시향의 캐릭터인 것도 같아요.

<말하는 드럼>은 무대 준비 시간이 또 하나의 무대였어요. 엉뚱한 곳에 세워 둔 악기를 가져 오고, 조그만 악기의 위치에 공을 들이고, 바퀴을 걸어잠그고 있노라면 자꾸 상상도 못 한 크기의 악기가 새로 등장해요. 무대에 미리 앉아 있는 관악 주자들은 흥미롭게 구경하고, 관객석에서는 이따금 피식 하는 웃음이 들리죠. "이만 하면 되겠지. 언제 시작한담. 대체 무슨 곡을 연주하길래 악기가 이렇게 산더미같이 필요해?" 하고 수군거리고 있는데, 문이 활짝 열리며 들어서는 건 족히 2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한 마림바예요.

처음엔 북의 울림을 사람의 목소리와 연결지어요. 이를 비틀고 뒤집으며 수 차례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북 소리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북 소리가 들리는 듯하죠. 연주자의 짤막한 외침이 한국어 의미를 가질 리도 없고, 우리가 어떤 지시를 받은 것도, 곡에 표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마법같은 일입니다. 타악기의 마법이에요. 연주자는 찬찬히 악기를 하나씩 살핍니다. 악기에서 악기로 옮겨갈 때마다 하나씩 악장이 바뀌는 느낌이지요.

그렇지만 연주자는 재료를 차례로 손질하는 요리사와도 닮았고, 처음 보는 악기가 신기해서 잔뜩 흥분해 있는 호기심 많은 사람과도 닮았어요. 그는 어떤 주제나 리듬을 연주할 생각이 아닌가 봅니다. 주제가 아니고 리듬이 아닌, 이면의 것을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하고 있어요. 그의 방식은 재료 손질에 더 가깝습니다. 똑같은 악기를 똑같은 주법과 리듬으로 두들기고는 잠시 멈추고, 두들기고는 잠시 멈춥니다. 시범을 보이는 건가요? 아뇨, 들어 보라는 거예요.
"이것 좀 들어봐, 사람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이 북 소리 있잖아, 사라질 때 고양이 울음소리 같아." 하며 옆에서 물건 하나를 질리도록 두들기는 사람은 상상이 가잖아요. 타악기 제각각에도 그런 이면의 소리가 있는 거죠. 먼젓번 타격의 울림과 다음번의 울림이 아주 특정하고 정밀한 간격을 두고 섞일 때만 나는 귀하디귀한 소리, 늘 섞여 나기 때문에 한 번도 구분할 생각을 하지 못한 소리. 바이올린에서 현이 떨리는 소리와 활이 현을 긁는 소리를 분리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호른의 소리를 입술 떨림의 축과 바람 세기의 축으로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탐구를 하기 위해서 팀파니 위에 심벌을 올려 둔 것이고, 그런 탐구를 하기 때문에 난타의 향연보다 더 재미있는 거예요.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은 상당히 좋았어요. 중간에 오케스트라를 보고 봉고 모양의 악기를 연주할 때, 클라이막스로 다가가면서 순간 엇갈린 일이 있었는데, 그걸 빼고는 놀라울 만큼 긴밀하게 연주했어요. 오케스트라 쪽 타악기는 제 자리에서 전혀 안 보였는데 이 분들도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셨구요. 박자 주고받기도 좋고, 한 쪽 소리가 묻히지도 않아요.

마치 영화를 한 편 본 듯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30분도 안 되는 곡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어요. 연주자 분과 함께 길고 설레는 모험을 마치고 돌아 온 기분이었어요. 앵콜에는 마림바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마림바의 저음이 그렇게 낮고 아름다울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사실 계속 마림바라고 쓰고 있는데 다른 악기면 어떡하죠?


빠르다! 이게 교향곡의 첫 느낌이었어요. 1악장은 클라리넷의 절절한 솔로로 막을 열지만, 악장의 핵심 내용은 현악의 트레몰로가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해요. 트레몰로가 나오는데, 순간 소리를 완전히 놓친 거예요! 이런 템포로 달리는 연주는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어떤 지휘자는 트레몰로의 한 음 한 음이 선명히 들릴 정도로 천천히 몰기도 해요. 아마 번스타인이었을 거예요. 그런 경우와 비교하면 거의 두 배 빠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어요. 곡은 이후 약간의 도움닫기를 통해 같은 멜로디를 다시 한 번 더 터뜨리는데, 이 때는 보다 웅장하고 천천하지만, 마찬가지로 도움닫기에서 순간적으로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를 심하게 걸어요. 이때 오케스트라를 확 휘어잡고 끌고 온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고, 파트 별로 조금씩 뭉개지고 처지는 게 보였습니다. 지휘자가 원하는 템포야 있겠지만, 이렇게 되면 안 하느니만 못하죠.

그렇지만 다이나믹 구성은 정말 좋아요. 바이올린이 각각 12명 즈음 되어 보였는데, 이런 숫자로 내는 포르티시시모(fff)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만했어요. 그러나 반대로 슬슬 조용해지기 힘든 인원수이기도 한데요, 아랑곳하지 않고 숨소리보다도 고요하게 잦아드는 피아니시시모(ppp) 역시 감동적이었습니다. 단원 개개인의 실력과 지휘자의 고집이 훌륭하게 화협한 거겠지요.

리허설 레터 P 즈음부터 나오는 목관 앙상블은 좋았어요. 그리고 첼로-베이스! 전반적으로 제가 알던 것보다 첼로-베이스가 묻히지 않게 힘쓰는 것 같아요. 이건 사실 모두가 그렇게 연주하는 걸 지도 몰라요. 저는 모니터나 핸드폰 내장 스피커로 들으니까 저음이 부족하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바이올린이 첼로에게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넘겨주는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연주에선 이어받은 첼로-베이스도 상당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좋았어요. 아, 그리고 레터 X 두 마디 앞의 하프가, 두 마디 더 일찍 나와버린 것도 굉장히 아쉬웠어요. 그래도 프로는 프로인지 정말 자연스럽게 넘어가더라구요.

2악장은 레터 C-D 사이에서 아첼레란도를 걸었는데 오케스트라가 거의 안 따라오더라구요. 레터 E에서 크고 천천하게 터뜨리는 걸로 보아 둘 사이에 대비를 시도한 게 아닐까 해요. 첼로 솔로는 원래 짧은데다 속도감 있게 넘어가는 바람에 개인적으론 아쉬웠어요. 그래도 끝엔 첼로 수석 분 따로 일으켜 세워서 박수쳐 드렸죠. 2악장은 아름답고 서글픈 멜로디로 시작하고 끝나지만 그 멜로디에 기반한 끔찍한 혼란이 내용을 온통 채우고 있죠. 레터 N처럼 굉장히 뾰족한 순간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어떤 서정성에 기대고 있는 점. 2악장의 매력을 잘 살린 좋은 연주였어요.

우려했던 일은 3악장에서도 일어났어요. 지휘자가 원래 살짝 빨리 지휘하는 건 맞는데, 이건 개별 박자로 봐도 그냥 오케스트라가 지휘자를 전혀 못 따라가는 느낌이었어요. 아마 레터 A 7번째 마디에서는 클라리넷이 팔분음표 여섯 개를 미처 다 불지 못했던 걸로 기억해요. 레터 D 이전의 8개 마디에서도 현악과 금관이 생각하는 박자가 달랐고, 레터 E 직후에 나오는 목관 앙상블은 박자가 아슬아슬했어요.

4악장을 아타카(쉼없이 이어서)로 한 건 정말 좋았어요. 현악의 비극적인 튜티로 시작하는데, 음량이 어찌나 크던지요! 직전 악장의 끝에서 팀파니와 트롬본의 음압에 귀가 잔뜩 눌렸을 텐데 그것보다도 크게 들리더라구요. 여기선 관악이 어택을 세게 주고 바로 빠져서 현악에게 길을 터주는 등, 지휘의 노련미가 특히 빛을 발했어요. 4악장은 정말 흠 잡을 데가 없어요. 굳이 따진다면 튜티에서 악기 소리가 온통 섞이면서 외려 무채색이 된다는 점? 그렇지만 멜로디를 하는 파트는 확실히 선명하게 잡아 줘요. 4악장은 아주 감정적인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온갖 파트에서 긁어대는 신경질적인 16분음표 멜로디, 그리고 애수 어린 안단테(천천히) 구간이 하나의 악장을 두고 심하게 갈등하지요. 전자에서는 완벽한 군무가, 후자에서는 넉넉한 비브라토와 커다란 음량이 필요해요. 둘 다 아주 성공적으로 해 내죠. 마무리의 피치카토는 악보에 쓰인 그대로, 달려 온 속도 그대로 정적으로 돌진합니다.


현악 파트는 실력 면에서나 협주 면에서나 정말 흠 잡을 데가 없었어요. 관악, 특히 호른에서 아쉬운 모습이 많이 나와서 역시 호른은 프로에게도 어려운 악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사실 호른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도 높지요. 지휘자의 템포 조절 문제일 수도 있고, 그냥 절대적인 연습 시간 부족이었을 수도 있어요. 하프가 일찍 나오는 실수를 한 걸 보면 특히 그래요. 핀란디아, 윤이상 체임버 심포니 1번, 그리고 브람스 이중 협주곡을 교향악축제의 무대(서울시향의 경우 2021년 4월 10일)에 올린 지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요.

벤스케 지휘자의 지휘 기술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무대 (관객 기준) 우측의 2층 객석에서 관람한 덕에 지휘자가 상시 상당히 가깝게 보였어요. 동작이 상당히 큰데, 그런 큰 동작은 주로 첼로-베이스나 양 바이올린 측을 바라보면서 크게 북돋아주는 듯한 모양으로 사용합니다. 온몸을 파트 방향으로 기울여서 강조를 하는 걸 보면서 진심으로 척추 건강이 걱정됐습니다. 내용 면에선 소리를 확 끊거나 눌러야 할 때, 주로 왼손을 통해 노련하고 완벽하게 소리를 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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