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다 (2018)

2021. 8. 13. 08:20문학과 예술/드라마·기타

너무 소중해서 천천히 아껴 보았어요. 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첫 두 화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트롤, 우드 맨, 우프(woof), 거인.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생물이 잔뜩 나오는데, 힐다에게는 전히 낯설지 않지요. 이들은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해요. 자연이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고 친절하지 않아요. 우드 맨이 화롯불을 쪼이려 문을 벌컥 열고 걸어 들어오는 장면만큼 놀라운 장면도 또 없었어요. 이게 바로 자연의 불친절한 모습 그 자체예요. 결코 사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길을 찾아 들어 와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요. 현실에서도 달콤한 과일이 놓여 있으면 어느새 벌레가 무리를 지어 나타나고, 가만 둔 음식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에 부패해요. 산등성이 굽이진 시골에선 음식을 밖에 두는 것만으로도 위험하지요. 자그마한 부스러기는 개미나 지렁이가 가져가지만 밤중엔 멧돼지가 나타나기도 하거든요.

음식뿐만이 아니에요. 꺼질 듯한 불씨 하나도 바람이 잘못 불었다간 손에 닿는 걸 모조리 집어삼키는 끔찍한 화염으로 변해요. 예고도 없이 비가 내리면 우리는 축축하고 불쾌한 기분을 한참이나 견뎌야 해요. 한바탕 비가 내리고 나면 집 구석구석에 곰팡이가 슬고요. 선선하고 기분 좋은 바람은 꼭 보이지 않는 먼지를 몰고 다니고, 꽃에는 벌떼가, 풀숲엔 뱀이, 불가엔 나방이, 물가엔 모기가……. 어찌 보면 인간은 조그마한 질서나마 만들어 보겠다고 애를 쓰며 살고 자연은 우리 곁에 와서 그 질서를 허물어뜨리기만을 반복해요. 우드 맨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오는 건 자연의 그런 막무가내인 면을 닮았죠.

그런데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걸까요? 힐다네 집은 고즈넉한 숲속에 있지요.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의 흔적조차 없어요. 자연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와서, 나무를 베어 집을 세운 거겠지요. 자연이 사람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고 사람이 아닌 것도 역시 자연의 일부일 뿐이거든요.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구태여 농사를 짓고 화롯불이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등 자연을 최대한 이용해내요. 때로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어요. 그저 저절로 그러함에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불청객" 우드 맨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그 자신이 최후통첩을 전달받는 "불청객" 힐다네 가족. 그래서 이 첫 화가 인상깊었던 거예요.

둘째 화에서는 거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힐다네가 엘프들과 화해해요. 갖은 고생과 수많은 우연 끝에 평화로운 삶을 겨우 되찾았나 싶은 찰나, 집이 무너져요. 커다란 집을 짓밟고도 서로에 푹 빠져 걸어 가는 거인의 뒷모습을 보며 힐다의 엄마는 망연자실하게 "They haven't even noticed what they've done.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네.)" 하고 말하지만 그러는 그도 역시 한 엘프네 집에 발을 들여 놓고 있었지요. 힐다네가 사려 깊지 못한 탓도 아니고, 그 누구도 잘못한 바가 없음에도, 그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자연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작품의 시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이었어요.

직후에 힐다는 결국 이후 트롤버그로 이주해 살게 되지요. 사실 많이 아쉬웠어요. 힐다가 마음껏 숲속을 뛰놀며 수많은 생물과 만나고 얘기하며 성장하는 그런 이야기인줄로만 알았거든요. 1화에서 트롤의 코에 종을 묶은 일처럼요. 힐다도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는 섭섭함이 가슴 속 깊이 남았겠지요. 그렇지만 자연의 바로 곁에서 자란 유년기의 소중한 기억은 힐다의 평생의 자산이 될 터, 언제까지나 숲 속에서 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 걸음 성장하는 모습이 바로 2화의 엔딩의 의의일 거예요. 다시 돌아봐도 굉장해요. 이 작품의 자연관과 각 캐릭터의 개성을 따뜻하고, 솜씨 좋고, 지루하지 않게 그려냈어요.


힐다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이제 남들과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나가요. 실수도, 실패도, 무모한 행동도 자주 하지요. 그 모든 과정이 소중하고 뜻깊은 추억으로 남는 건 작품 시종 나타나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덕일 거예요. 힐다의 엄마가 힐다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잘 클 수 있게 지도해 주던지요. 좋아하는 기상예보관의 집에 실제로 놀러가 보고,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숲속의 집에 갇히고, 코에서 불을 뿜는 용이지만 꽃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린드웜(Lindworm)이라는 생명체를 만나고, 악몽에 시달리고, 모든 잃어버린 물건이 모이는 틈을 탐험해요. 아! 이런 틈이 있다는 걸 상상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져요. 린드웜이 나오는 에피소드에서는 고향을 잃어 복수심에 불타는 엘프 세대와 새로운 곳에서 태어나 이미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는 세대가 나오죠. 이런 작품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시즌 1을 마무리한 만족감이 너무 커서, 시즌 2는 더욱 아껴 보아야겠다 했다가 아직 시작도 못 하고 있어요.

캐릭터 디자인도 정말 귀엽고 깜찍해요. "사슴여우 (deer-fox)" 트위그 인형이 있으면 갖고 싶어요! 힐다의 성우를 맡은 벨라 램지 (Bella Ramsey) 분의 연기도 완벽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