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트 Colette (2018)

2019. 5. 5. 00:09문학과 예술/영화

190428 @ 아트나인 9관

19세기 말 프랑스, "윌리"라는 필명으로 유명했던 작가 앙리 고티에-빌라르와 결혼한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주인공이다. 허풍과 겉치레의 인상이 강한 윌리는 프랑스 사교계에 호색한으로 알려진 인물이고, 콜레트는 부르고뉴의 시골 지방 생 소뵈르에서 나고 자란 아이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윌리는 자신의 대필 작가 대신 콜레트에게 글을 써 보게 하는데, 이 책이 출판되고 종전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는 대인기를 누리게 된다. 주위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받으면서 콜레트의 생각도 마음도 조금씩 변해간다.

 

 

윌리가 처음 등장하는 마굿간에서 콜레트는 사랑하는 둘이 같이 있기만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콜레트는 완벽한 사랑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 후의 콜레트의 삶은 윌리를 떼어놓고 얘기할 수가 없고, 윌리가 정의합니다. 비서와 다를 바 없이 손님을 맞고 편지를 대필하는 콜레트는, 비록 익숙한 젠더 역할의 답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름 행복하고 사랑에 가득찰 수도 있었겠죠.
윌리의 방탕한 생활(매번 달라지는데, 도박, 경마, 성 구매, 골동품 수집 등을 원껏 즐기면서 콜레트에게는 늘 거의 파산 지경이라 쓸 돈이 없다고 말합니다)를 보면 이 사랑이 오래 갈 수가 없음을 압니다. 첫 소설에 사무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윌리에게 콜레트는 오직 당신을 위해서 썼다며 말합니다.

<학교에서의 클로딘> 소설의 대인기에도 초연한 콜레트. 저 표정과 자세, 너무 좋지 않나요?

그런데 재산 압류에 떠밀려 발매한 첫 <클로딘> 작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갑니다. <클로딘>의 성공 후에도 윌리가 대성공과 유명세를 온껏 즐기는 모습이 콜레트는 귀엽기만 한 것 같습니다. "기여를 좀 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이름을 떨치고 싶어하지는 않는 태도는 대사에서도 나옵니다. 그런 그를 처음 부추겨 설득한 건 미시였습니다. 조지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끝난 후 콜레트는 <클로딘>의 연극에서 미시와 만납니다. 미시는 짧은 머리와 정장 차림으로 다녔는데 이런 옷차림이 당시엔 불법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3세가 삼촌뻘이고 어머니가 니콜라이 1세의 딸이라고 알려진 그이기에 그나마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미시가 콜레트에게 건네는 말은 하나같이 깊습니다. 성인이 되어가는 여성들에게 목소리를 주었다며 그 공을 스스로에게 돌리라고 말하고, 윌리의 구속, '목줄'을 지적합니다.

처음으로 콜레트는 윌리에게 공동 집필 명의를 요구하지만 대번에 퇴짜를 맞습니다. 강가로 뛰쳐나온 콜레트가 본 클로딘들. 이후 콜레트는 글쓰기를 완전히 접고 팬토마임 무대에 나섭니다. 미시와의 키스 장면으로 거센 반발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윌리는 급전이 필요했는지 <클로딘>의 모든 판권을 5,000프랑으로 올렌도르프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콜레트의 동의는 하나도 구하지 않았죠. 여기에서 콜레트는 <클로딘>에 대해 확실히 달라진 태도를 보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쓴 소설이고, 나의 모든 것을 담아서 쓴 반(半)자전적 소설이며, 윌리와 자신의 관계에 남은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윌리는 콜레트의 이름을 넣는 것조차 반대했었죠. 여성 작가 소설은 안 팔린다고 했었습니다. 글은 노예처럼 감금당해서 감시당하며 썼었구요. 그 결과물에 대한 명성도, 돈도, 시골 집과 판권 모두가 지금 보니 윌리의 소유였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직시해, 윌리를 완전히 떼어내는 이 순간을 위해서 영화는 이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콜레트의 성장 서사라고 당연하게 말하기에 너무나도 많은 곁가지가 그려져 있어 성장 서사 부분을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영화의 정말 많은 부분이 현실에 기반해 있다고 합니다. 이 장면, 이 인물이 왜 여기서 등장했어야 할까?에 대한 답은 모두 '현실에서 그랬기 때문에'가 될 것 같습니다. 남의 삶이니 그런 질문은 할 수가 없겠죠.
대신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영화가 한 일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윌리가 <학교에서의 클로딘>을 처음 읽었을 때 정신없이 열중해서 읽고서도 박한 평을 남긴 이유는, 완벽한 작품을 읽고 시샘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작품에서 군데군데 부족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재능이나 안목이 인정할 만한지는 모르나 어쨌든 문학계 인물이기도 했구요. 물론 그가 찾아서 채운 '부족함'이 문학적인 내용이었는지, 영화가 암시한 듯 경망하고 도발적인 덧붙임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콜레트의 첫 작품이 너무 훌륭해 윌리가 뛸듯이 기뻐하며 출판하고 마찬가지로 대성공을 이뤘다면 그 뒤로도 승승장구가 이어질 단순한 성공담이라는 인상을 줬을 수도 있어요. 그러지 말란 법은 없죠. <오션스 8>처럼, 여성 주연이나 여성 서사라면 그런 짐짓 시시해 보이는 작품도 얼마든지 재미있어지니까요. 다만 현실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가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서사였을 거예요.

결혼 당시 콜레트의 나이는 20세, 윌리는 34세였다고 해요. 두 인물이 처음 함께 등장한, 콜레트가 가장 어렸을 때의 장면에선 그 열네 살의 차이가 무섭도록 확연하게 다가옵니다. 실제 배우의 나이 차이도 거의 비슷하네요. (나이틀리 85년생, 웨스트 69년생)

1900년 전후에 머물러 있는 모든 옷차림과 세트장 풍경만도 보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키이라 나이틀리 배우분도 정말 잘 어울렸구요. 어느 장면이든 아무튼 누군가는 술잔을 들고 있었다는 인상도 있네요. 위스키, 샴페인, 와인. 영화 속 술은 빛이 정말 예뻐서 맛도 상상하게 됩니다. 배우가 실제로 마시는 건 사과 주스 같은 거겠지요. 안타깝네요.

 


LGBTQ 측면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지요. 콜레트 본인이 우선 영화에서 (지정성별) 남성과 여성 모두와 관계를 가지지요. 그의 젠더를 바이섹슈얼, 팬섹슈얼 같은 언어로 지금 규정하는 것은 어려울 뿐더러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도 퀴어는 어디에나 있었다는 점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그런 당당함이 영화 내내 느껴집니다.
당시 사회에서도 이런 이들을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어디에도 없을 이들로 취급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신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태도는 아니었겠지요. 있는 줄은 알지만 내 눈 앞에는 없었으면 하는. 이미 여러 아젠다에서 익숙히 접한 태도라고 느끼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중간에 콜레트와 어머니 시도가 이혼하네 마네 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할 때 윌리는 나타나서 '여자들, 칼... 그리스 비극 같네!'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동성애, 이성애, 그리고 모든 '퀴어'를 딱 그 정도뿐인 배려와 존중으로 타자화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무대 위의 콜레트와 미시가 키스하자 의자를 던지는 사람의 태도가 짐짓 무관심해 보이는 이런 타자화의 태도에서 별로 멀지 않다는 건 늘 놀랍습니다.

콜레트의 성장 서사를 강조하느라고 조지(Georgie)의 존재도 잠시 배제했습니다. 영화에서는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쪽지를 건네받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합니다. 콜레트와 조지는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것 같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뒤따릅니다. 콜레트의 바이섹슈얼리티는 어쩌면 잔 드 까이야베(Jeanne de Caillavet)의 장면에서 암시했는지도 모릅니다. 콜레트에게 androgynous한 면이 있다는 잔의 대사와 뒤이어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아내쪽에 관심이 가더라는 콜레트의 대사 모두, 돌이켜 생각하면 조금 억지스럽기도 하나 분명 넌지시 가리킨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콜레트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든 그게 그를 칭송하거나 비판할 이유는 되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마주하고 추구하는 모습이 콜레트를 추켜세울 이유가 되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대단하다'라는 말은 그래서 적절치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에 두려움이 없었던 모습이 저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니까요.

LGBTQ pride의 당당한 태도는 캐스팅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영화가 끝나고 자료를 찾으면 찾을 수록 괜히 신났습니다. 괜히 유난스럽게 나열하는 것이 조금 실례 같지만 일부러 언급을 피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 써봅니다. 감독 Wash Westmoreland 분은 openly gay이며 작고한 배우자 분과 함께 콜레트의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합니다. 가스통(Gaston)이라는 시스젠더 역을 맡은 Jake Graf 배우분은 트랜스젠더입니다. (트랜스로서 시스를 연기하는 기분이 어땠냐는 질문에 "In a weird way, I’ve played cis most of my life under the guise of a woman!" 이라고 대답하는 인터뷰가 재밌었습니다. 링크) 또 첫 <클로딘> 책의 발표 이후 어느 서평을 극적이게 낭송하며 이 책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말하는 단역 인물인 Rachilde(발음을 모르겠네요)도 트랜스젠더인 Rebecca Root 배우 분이 맡았습니다. Rachilde는 당대 태동기였던 페미니즘에 공개적이고 확실하게 반대하는 의사를 수 차례 밝혔고, 동시에 그의 저작에서는 젠더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이 많이 나타난다니 여러 모로 궁금한 인물이네요.

콜레트와 정말 오랜 시간을 보낸 미시. 미시 본인의 행적이 지금 일컫는 트랜스젠더라는 개념과 여러 점에서 합치하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도 최소한 시스 젠더 캐스팅은 해서는 안 됐으며 그 점이 실망스럽다고 말하는 기사(링크)의 지적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15세 관람가임에도 조지나 미시와의 섹슈얼한 묘사에 거리낌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윌리와의 묘사는 없다시피 했네요.) 그 자체가 놀랄 일인가 하면 등급제와 청소년 성에 관한 얘기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그 얘기보다 다른 많은 영상물에서의 보수적인 등급 책정과 대비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장르로서의 '퀴어 영화'(게으른 표현이지만요)에서, 꼭 사랑을 믿지 못해 숭고한 우정 같은 걸로 치환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지동설을 인정할 수 없으니 천동설에 보정을 추가하듯 말이지요. 그래서 마치 그런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보다 적극적으로 섹슈얼한 묘사를 차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나이브하고 일차원적인 해석으로도 들려서 당당하게 주장하기는 조금 어렵네요.

 


<더 와이프>의 트레일러가 대필 작가와 명성과 두 사람 간의 관계의 파괴에 관한 암시만 잔뜩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콜레트>와 비슷할지 모르겠네요.

기본 대사는 다 영어이고 각종 고유명사는 모두 프랑스어 사용한 점이 재밌었어요. 영어식 발음이란 게 원어의 발음을 많이 파괴하잖아요. 프랑스인의 연기를 하면서 '파리스'라고 발음해야 하는 점이 모순적이라 재미있었네요.

시대적 흐름이 느껴지는 요소가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콜레트의 첫 살롱 장면의 첫 대화는 파리 한가운데에 막 완성된 에펠탑으로 시작하죠. 전기 램프를 똑딱이는 장면은 윌리가 듣는둥 마는둥 금세 돌아섰고 정말 비중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클로딘 연극이 끝나고 집에 들어오는 장면에서는 집 자체도 상당히 좋아졌고, "우리 집에도 놓아야겠다"던 윌리의 말대로 전기 램프가 들어와 있습니다. <결혼한 클로딘>을 쓰는 장면에 즈음하면 찍어 쓰던 펜이 만년필로 바뀌어 있구요. 잉크를 찍는 장면이 너무 좋아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뚜껑을 열고 바로 글씨를 써서 살짝 아쉬웠네요. 사무실이 생긴 후에는 타자기와 전화기도 등장합니다. 자동차도 어느 순간 등장했구요.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느낌이 좋았어요.

공동 집필 요구를 거절하자 환멸을 느낀 콜레트. 강가까지 걸어나오는 장면이 무언가 극단적인 생각을 묘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저 아래에 클로딘을 따라한 학생의 모습을 봅니다. 모든 여성이 클로딘을 좇는 모습은 저는 조금 무서웠습니다. 첫 작품과 그 연극에서의 클로딘이 교복을 입는 어린 학생이고, 현대 사회의 여성상이 어린 여성 쪽으로 향하는 현상에 대한 논의를 모르지 않는 까닭이었습니다. 미시는 그런데 그 점을 아쉬워하기보다는, you've invented a type이라고 칭찬해줍니다. 여성의 상징이 되는 캐릭터를 여성이 그려냈다는 일의 의미. 교복이 어린 여성으로서의 여성상에 대한 추구로 이어지는 일을 떠올린 건 기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살인마 클로딘' 얘기가 나오자 미시가 good for her라고 대답하는 장면도 정말 좋았습니다. 영화가 조금만 시선을 돌려 주목의 위치를 바꿨다면 전기 영화보다 페미니즘 영화라는 분류가 더 잘 어울리기도 했을 거예요. 페미니즘 영화는 몇몇 특별한 대사를 비법 양념처럼 넣어서 만드는 게 아니고 평범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놓고 보면 그가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도 많이 당해서 페미니즘 영화가 되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콜레트>를 보면 오히려 일부러 조금 줄였다(tone down했다)는 낌새도 듭니다. 윌리에 대한 묘사도 관객의 상상에 많이 맡겼구요. 글쎄요. 콜레트가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 콜레트의 전기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가 되도록 할까요?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는 이 '살인마 클로딘' 장면, 그리고 처음으로 부르고뉴로 돌아와 어머니 시도(Sido)와 함께 정원을 돌보는 장면만이 특히 기억에 남네요.

별장(시골 집)에서의 감금 장면은 의도했을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실존인물인 콜레트 분에게도 아마 잊고 싶은 기억이었을 거예요. 윌리는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합니다. 콜레트의 머리를 자르고 교복을 입히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일방적인 관계이고 위선적이며 끔찍한 인물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영화의 시선이 참 덤덤하지요.
윌리가 대필을 맡기면서 늘어놓는 이야기, 악으로 묘사되는 관능적인 여성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남성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베누스와 탄호이저 같은 느낌인데, 참 저렴합니다. '창녀와 성녀'로 불리는 '남성의 여성상'의 틀에 박힌 구현이죠. 비슷한 시기의 문학이 그리는 여성이 그와 동일하지는 않아도, 딱히 그보다 더 창의적이지도 않았을 것 같네요.

주요한 클래식 배경 음악은 드뷔시, 그리고 생상스였습니다. 그럼 그렇지 베토벤을 썼겠어, 싶어서 속으로 많이 웃었네요.

 

블로그에 올리는 첫 영화 리뷰입니다. 앞으로도 재미있는 영화 많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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