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 형제와 사고팔고 (2020)

2021. 11. 9. 20:47문학과 예술/드라마·기타

사고(四苦)와 팔고(八苦), 네 괴로움과 여덟 괴로움. 괴로움이 참 많지 않나요? 사람은 누구나 괴롭고, 괴로워하면서 살아내는 게 삶입니다. 괴로운 사람만이 살아있다, 그런 비관적인 말도 완전히 틀리진 않았겠죠. 괴로움은 그래서 삶의 급소 같기도 해요. 가장 큰 약점이지만 동시에 가장 필요한 곳. 삶의 모든 것이 교차하는, 무릇 세상에 태어난 삶이라면 꼭 가지고 있는 게 바로 괴로움 아닐까요. 태어나고 만 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요.

이 드라마는 그런 급소를 지그시 눌러요. 삶의 구석구석에 놓인 열두 개의 괴로움을 하나하나 짚어대요. 촉각이 통각으로 변하기 바로 직전까지요. 옹졸한 성격, 변변찮은 형편의 형 코타키 이치로(古滝一路)와 경박하고 철없는 성격의 무책임한 동생 코타키 지로(古滝二路)는 함께 "렌탈 형제" 일을 하며 갖은 일을 겪습니다. 열두 빛깔의 괴로움을 직접 겪기도 하고 곁에서 지켜보며 당사자와 발맞춰 묵묵히 걸어나가기도 해요. 당황하고 놀라고 떨떠름해도 하다가, 즐거워하고 뿌듯해하기도 해요. 쉼없이 불평, 불만을 늘어놓지만 결국 묵묵히 헤쳐나가요. 렌탈 형제의 캐릭터가 정립되고 나면 두 사람이 늘상 앉아 있는, 드라마의 무대인 찻집 샤바다바에서 일하는 종업원 사사야 사츠키(笹谷五月)의 이야기도 펼쳐지지요.

주인공들은 결코 절망에 빠지지도 안주하지도 않아요. 쉬운 길과 올바른 길 사이에서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낯선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해요. 자기의 상황과 처지에서의 최선의 행동을 고민하고, 이때 늘 타인과 세상을 염두에 두어요. 그게 좋았어요. 위인도 상식인도 아닌 사람들이 세상의 풍파에 나자빠지는 모습은 희극이지만, 그들이 반성하고 나아가려 하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엄숙하게 삶을 고민하게 돼요. 그 왜, 살다 보면 그런 걸 깨닫는 순간이 있잖아요. 제아무리 유복하게 지낸 사람이라도, 정말 평범하고 보잘것없이 살아온 듯 보이는 사람도, 남들은 상상 못할 비극을 저마다 가지고 있고, 너무나도 극적인 삶의 궤적을 그려왔을 거라는 사실을요. 그래 한낱 범인(凡人)의 삶에서도 우리는 아픔을 읽을 수 있고, 남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나면 가슴 속엔 까닭 모를 안도와 희열이 남지요.

열두 개의 괴로움을 주제로 삼았지만 결코 슬픔과 분노를 선정적으로 그리려 들지 않아요. 대단한 악한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평범한, 보잘것없는 인물이 부닥치는 사건들을 차분히 그리고, 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넌지시 알려 줄 뿐이에요. 삶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일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교훈을 직설적으로 제시하지도 않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끝나갈 즈음에 가슴 속에는 묵직히 내려앉는 응어리가 있어요. 이 응어리가 비명을 지르는 듯해요. 매 화의 이야기는 결코 말끔히 해결되지 않고 섭섭한 마음을 잔뜩 남겨요. 그렇지만 우직하게 결말을 짓고서 드라마는 앞으로 나아가요.

제9화의 알쏭달쏭함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주인공들은 부탁을 받고 어느 세미나에 참가해 보는데, 온 강당이 달아오르는 열정적이고 고무적인 분위기가 마치 종교를 연상케 합니다. 주인공들은 세뇌에 빠진 이들을 구하려 듭니다. 이때 주인공과 이 세미나 주최측은 마치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으로 대비돼 보이고, 이내 이 두 파벌의 경쟁 구도가 펼쳐집니다. 그렇지만 결국 에피소드가 끝날 때 뭐가 남았나요? 밥(ボブ, Bob)의 손아귀에서 구해냈던 사람은 다시 기꺼이 그를 쫓아갔고, 형제는 하마터면 직업을 잃어버릴 뻔했어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자기들이 어리석었다고 순순히 받아들이지요. 이들이 한 일이 완전히 잘못이었다거나 밥이 훨씬 나은 사람이었다고는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일어난 일을 덤덤하고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는 모습에서는 배울 점이 많았어요.


에피소드 형식이지만 드라마 전반에 걸친 큰 스토리 흐름도 있어서 매번 다음 화가 궁금했어요. 아껴 봤다니까요! 차분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드라마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구나, 했어요. 《언내추럴》(アンナチュラル),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逃げるは恥だが役に立つ)도 담당하신 노기 아키코(野木亜紀子) 분의 각본인데, 어떡하죠? 이러다간 이 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게 생겼어요.

최고의 에피소드: 제12화
몇 번씩이나 여기에 글귀를 적고 지웠어요. 단 하나를 고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단 하나를 고른다면 마지막 화가 생각나요. 우연을 거듭해서 어떻게든 가족의 비밀을 밝혀버린다든가, 이미 사츠키가 알고 있었다거나 하는 결말이었으면 분명 아쉬웠을 거예요. 너무 완벽해서, 그래서 더 아쉬웠을 거예요. 모두가 극히 행복한 채로 끝나는 결말이 어울릴 드라마가 아니거든요. 누구나 이런 복잡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평범한, 코타키 형제나 사츠키, 그리고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저 응어리를 가슴에 묻고 어떻게든 나아가야 해요. 드라마는 그래서 우리에게도 묻는 거예요. "사츠키와 코타키네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의 열린 결말이 아니라, "코타키 형제는, 또 사츠키는, 찻집 샤바다바에서 함께 한 이 시간을 어떻게 추억하며 살아가게 될까?"의 열린 결말. 그런 질문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니까요.

그 외에, 어느 하나 최고를 꼽을 수 없던 화들.
제2화, 구부득고(求不得苦).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リップヴァンウィンクルの花嫁, 2016)의 얘기를 정말 어디서든 하게 되네요, 정작 영화를 본 지도 3년은 된 것 같은데. 결코 한심하거나 불쌍하게 바라보지 않는구나 싶었어요. 황당해 하고 생경해 하는 형 이치로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생색 내지 않으려 하는 동생 지로, 이 조합의 가능성을 보여 줬어요. 자전거의 앞뒤 바퀴처럼 균형 있게 끌어나가는 거죠.
제4화, 사고(死苦). '세상의 멸망'이 뭘 의미하는 지 알아채기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새하얀 벽지, 바닷가 주택의 노을진 풍경. 온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이 깨끗하고 아득했어요. 연출도 세심하고 깔끔했어요. 장례식장으로 이렇게 묵직하게 컷하다니요.
제6화, 세간박고(世間縛苦). 지로가 특별히 마음에 드는 인물은 아니고 썩 대단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좋았어요. 지로의 독백 사이사이에 흘러나오는 단단한 침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였고, 단단한 벽이었어요. 친근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치장한, 입을 틀어막고 눈초리만으로 세운 벽이요. 이 벽을 단호한 말로 뚫어내는 장면, 누구든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제7화, 병고(病苦). 식물이 되어 잠드는 연출도 귀여웠지만, '병고'라는 주제가 주는 선입견을 깬 것 같아 인상적이었어요. 사회가 만드는 병적인 환경, 유독한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으니까요.
제8화, 오은성고(五蘊盛苦). 중간에 무라타(ムラタ) 씨가 그런 말을 하죠. "오온성고는 공(空)이에요." 이 말을 들은 사츠키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기억에 남구요. 웃음기 넘치는 30분이었지만, 다루는 내용을 가만 생각하면 진지했어요. 젠더의 내면화라고 요약하면 너무 단순할까요? 무라타 씨는 젠더가 세상적, 후천적이라 말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제10화, 노고(老苦). 억지 감동으로 용서하려 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잖아요.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일을, 그 사람 없이 어떻게 삭혀야 할까? 세상이 나에게 저지른 일을 누구에게 항의해야 할까? 미워하던 사람이 한없이 낮아지고 하찮아졌을 때, 그 복잡한 감정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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