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2악장

2021. 6. 24. 05:03문학과 예술/음악

좋아하는 2악장을 모아봅니다. 계속해서 수정됩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3번, op. 37. Largo

1악장 끝의 화려한 카덴차와 코다가 공중에 흩어지고 나면 숨막히는 정적만이 짙게 찹니다. 그 정적은 어쩌면 가장 소중한 음표라서, 피아노 앞에 앉은 사람은 늘 이 음표를 가장 주의 깊고 섬세하게 연주해요.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건반 위에 내려놓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툭 놓으면 땅이 묵직하게 울리듯, 그가 연주하는 첫 화음도 제자리에서 뭉툭하게 울립니다.

E-B-G의 변조를 거쳐서 다시 E로 돌아오는 피아노 독주는 조그만 피아노 소나타같아요. 뒤따르는 오케스트라의 튜티는 가슴이 떨리게 아름다워요! 첼로&비올라 파트에서 연주하는 멜로디가 천천히 솟을 때의 벅차오르는 고양감 있잖아요. 고음부 목관이 플룻 뿐이라서 바이올린과 때로는 대비하고 때로는 호응하는 그 모든 장면이 몹시도 생생하게 들려요. 호른 덕에 느린 악장의 '찌르지 않는' 스포르잔도를 완벽히 구현할 수 있었어요.

오케스트라가 완벽한 E major의 정격 종지를 호소하고 나면, 악장의 처음으로 돌아온 듯 피아노의 독주가 시작합니다. 화성 진행도 비슷해요. 그런데 뭔가 달라요. 음표가 잘개 쪼개져 있고, 박자를 밀고 당기며 불규칙하게 춤추고 있어요. 그 틈으로 현악이 들어오면서 어느새 B로 이조하죠. 피아노가 힘겹게 솔, 라, 시, 그리고 도를 찍고 내려오자마자 현악은 이번엔 G로 이조해 버립니다.

피아노가 네다섯 개의 옥타브를 넘나들며 아르페지오를 펼치고 바순과 플룻이 독주를 주고받습니다. 간결하고 그리고 아름다워요. 피아노가 저 높은 곳에서 이따금 별빛같이 반짝이는 순간도 좋고, 현악의 피치카토도 소중해요. 이럴 수가, 정신이 들고 보니 B7 코드입니다. 저 높은 파 음을 찍고 물 흐르듯이 떨어진 피아노는 다시 꾹꾹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시, 도, 레, 그리고 다시 - 미. 곡은 맨 처음으로 돌아왔어요. 여태껏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구간이 E-B-G-E의 진행이었다는 점도 좋아요.

악장 시작에서 깊은 감상에 젖어들게 한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풀이되지만, 이제는 오케스트라가 곁에 있어 계속해서 공백을 덧그려 주고 있어요. 저는 이 부분을 들으면 정말로 그런 감상에 빠져요. 혼자였던 피아노에게 든든한 오케스트라가 나타나 더 이상 외롭지만은 않다는 느낌이요. 오케스트라만의 튜티도 다시 한 번 반복하구요.

마지막엔 오케스트라가 한껏 분위기를 끌어올려 피아노에게 건넵니다. I-IV를 받은 피아노는 끝까지 풍부한 표현으로(sempre con gran espressione) 마지막 독주를 선보이고, 끝에 오케스트라에게 V를 건네 참으로 차분한 V-I의 마무리를 짓습니다. 마지막에 옥타브를 걸어 내려올 때 플룻과 호른으로 받치게 한 선택도 완벽했지요. 악장은 포르티시모의 코랄로 마무리됩니다.

 

울적했던 어느 날엔 이 곡을 듣고 펑펑 울었어요. 가사 한 줄 없는, 백 년도 더 된 곡이 그렇게나 큰 위로를 줄 수 있더라구요.

마우리치오 폴리니 협연,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의 1992년 연주가 애플 뮤직에 있어요. 누군가의 재생 목록에 있는 게 우연히 검색에 걸렸는데, 숨 막히게 좋았어요. 엇갈리는 장면은 가끔 있지만, 음색에 있어선 단연코 최고의 연주였어요.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 WAB 107. Adagio. Sehr feierlich und langsam

브루크너는 바그너의 머지 않은 죽음을 인지하고 이 악장을 썼다지만 브루크너 본인의 장례식에서 이 악장이 연주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곡이 임종의 곁으로 자주 불리는 까닭은 슬프고 어두운 분위기의 탓이 아니라 오히려 곡의 절정에서 맞이하는 달성감, 해소감이 아닐까요.

미묘한 이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동안 영구히도 반복하는 도-레-미의 주제가 있고, F#로 제시되는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선율은 반복적이라 오히려 조성이 멜로디를 만들죠. 레터 K에서의 C major의 고조가 있고, 레터 M부터는 도레미-도레미-레리미의 모티브를 한없이 반복하며 쌓아나가면서 만든 레터 O의 G major 하이라이트가 또 있습니다. 뒤따르는 레터 P의 퍼스트-세컨드 바이올린 협주(A flat→E→…)도 아름다워요. 레터 S에서 바이올린이 여섯잇단음표를 연주할 땐 조용해서 잘 들리지 않지만 여기서 시작한 크레셴도는 장장 3분이 넘게 이어져요. 벅차오르는 느낌을 이다지도 길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크게, 자꾸만 더 크게 차오른 음악은 레터 W에서 끝내 쏟아지며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포효합니다.

그리고는 C major를 단언해버리고, 피아니시모(pp, 매우 여리게)로 줄어든 레터 W 7마디에서 반음을 높입니다. 악장 처음의 분위기로 돌아가 플룻, 튜바, 바이올린, 그리고 클라리넷이 돌아가며 기묘하게도 안심이 되는 C# major로 정리하며 곡은 매듭짓습니다.

이 악장은 끊임없이 장조와 단조를 대조하고, 그를 위해 3도음의 위치를 시험하는 듯해요. 악보를 차분히 따라가면서 공부해 보고 싶어요.

유튜브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루체른 페스티벌 공연 영상(x_IbwlSXHpQ)이 있습니다. 유튜브의 클래식 음악 영상이 흔히 그렇듯이 출처가 불명학한데요, 2005년 공연에서 선보인 적이 있다고 하니 그때일지도 모르겠어요. 4-5악장의 E-F#-G#을 단단히 끊는 게 깔끔하고 좋아요. 그 자체로도 맵시가 있는데다 레터 S에서 재현되는 모습을 보면 감탄스러워요! 바이올린의 아르페지오에 관현악이 길을 내어주는데, 조화하는 아름다움과 구슬픈 선율이 너무나 깊이 대비돼 나타나요. 동형의 선율을 수없이 이조하며 반복하는 까닭에 이조 자체가 선율을 그리는 듯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연주는 그런 거시적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느낌이에요. 아다지오(느리게)의 속도, sehr feierlich und langsam (몹시 장엄하고 천천하게)의 지시어에도 불구하고 결코 늘어지지 않아요. 지금의 선율의 아름다움을 탐닉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돋보여요. 녹화 상태가 아주 안 좋은 건 아쉬워요. 특히 피날레의 마지막의 마지막에 들어서는 순간의 지터 말이에요!

바렌보임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1992년 녹음이 있더라구요, 애플 뮤직에. 현악과 관악 중에 꼭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면 이 연주는 분명히 현악의 손을 들어 주는 연주예요. 호른과 트롬본이 꾸준히 개입하며 복잡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쌓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이 연주는 그런 금관을 상당히 부수적으로 놓고 있어요. 물론 레터 O-P 사이처럼 금관이 주 멜로디를 맡을 땐 제 몫을 다하도록 놓아주지만, 그 외의 경우엔 현악의 멜로디가 관악보다 확실히 위에 놓여 있어요. 레터 S에서 꿋꿋이 버티는 퍼스트 바이올린을 보세요. 앞선 아바도의 연주와 대비되는 점은, 음표 하나하나가 만드는 복잡한 화음을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상당히 차분한 박자 위에서 음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듯이 표현해요. 음 한두 개를 빼서 옮기기를 반복하며 교묘히 화음을 이어나가는 솜씨를 감상하기엔 오히려 이런 연주가 더 좋겠어요.


말러, 교향곡 제6번. Andante moderato

해석에 따라 스케르초 악장과 위치를 바꾸곤 하지만, 2악장에 놓이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여기 있을 자격을 얻지요.

모든 악기가 피아니시모(pp)의 셈여림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E-flat major가 일단 재밌는 선택이지요. 1악장은 박력 있는 A major로 끝나고, 스케르초 악장을 하고 온대도 그 끝이 morendo(죽어가는 듯이) 그 자체인 고요한 A minor로 맺으니까요. 아마도 A minor-C major-C minor-E-flat major의 관계겠지만, 어떻게 이어 봐도 멀어요. 덕분에 이 악장의 시작은 방금까지 들은 곡과 전혀 다르게 들리죠. 직전 악장에선 혼잡한 도시에 있었는데, 일순간 숲속의 호젓한 오두막에서 눈을 뜨는 기분입니다. 곡의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위해선 확실히 이 정도의 격리가 필요했겠지요. 처음 제시된 주제는 계속해서 변형하며 발전하지만, 그 모양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듯합니다.

이어 오케스트라가 가장 작은 소리로 잦아들고, 리허설 넘버 92에서 바이올린의 환상적인 하모닉스와 함께 곡이 E-flat major에서 E minor로 전합니다. 여기서부터 전개하는 장경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서정과 애수였어요. 가만히 앉아 듣고 있으면 눈물이 왈칵 납니다. 슬픔이 한껏 고조되려는 순간, 그 핵심적인 순간에 말러는 비극의 머리를 잡아채서는 E major의 장조로 돌려버립니다. 아아, 카우벨. 배경에서 들리는 기묘한 쇠붙이의 울림이 이토록 다정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요.

이어 커다란 해소감이 드는 C major를 거칩니다. 연주자 입장에서는 조표를 떼어낸 해소감이 있죠. 넘버 98은 A major로 들어가는데, 하프와 첼레스타가 함께 울릴 땐 천상의 소리라 부름에 손색이 없어요.

넘버 99는 앞서 92와 닮아서, 차분하고 목가적인 멜로디 뒤에 어려 있는 단조의 기색(A minor)을 서서히 끌어냅니다. 넘버 100에서 벌써 전율이 찾아오지요. 이제 오케스트라 백수십 명의 단원의 목적은 하나예요. 온 힘을 다해서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폭발적으로 절규합니다. 찢어지는 금관 뒤에 깔리는 카우벨이란! 악기가 수없이 맞부딪히는 가운데에 곡은 파도에 휩쓸리듯이 천천히 그리고 아주 극적으로 B major의 해소로 이끌려 갑니다. 163마디(넘버 101의 4번째)에서 결국 해소해내고야 말지요.

그렇지만 아직 뭔가 너무 밝아요. 말러는 Immer mit bewegter Empfindung라고 지시합니다. 이탈리아어의 sempre più mosso와 비슷한, "계속해서 움직이며"의 뜻인가 봅니다. B major에 만족하지 않고 장3도 음인 E♭에서 출발합니다. 지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내딛어 올라가며, 끝내 G를 긁어내면서 그토록 바라던 E-flat major로의 귀환을 이루어냅니다. 마침내요. 그리고는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같은, 아름다운 결말을 그려냅니다.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유튜브의 아바도 지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2006년 영상(YsEo1PsSmbg)이에요.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긴 러닝타임에, 마냥 틀어 두고 다른 일을 하곤 했어요. 아마 그 유명한 테오도르 쿠렌치스 지휘, 무지카 에테르나의 2018년 발매 앨범을 들으면서 점점 좋아하게 됐을 거예요. 이제는 클래식도 좋아하는 사람이 대체 어떻게 이걸 배경 음악처럼 쓸 수 있었는지 그저 의문일 뿐이에요.

피에르 불레즈, 빈 필하모닉의 1994년 녹음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간에 유명한가 보더라구요. 전 평범했어요.

바비롤리와 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967년 연주. 마침 2악장에 느린 악장을 뒀네요! 비단 이 악장뿐만이 아니라 이 녹음 전반이 음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것마냥 차분하고 저음을 긁는 첼로·베이스는 때로 기괴하리만치 단도해요 (gruesome이라는 영단어가 어울려요). 그리고 아마 당대 녹음 기술의 문제겠지만, 애플 뮤직의 녹음본에선 고음부가 상당히 왜곡돼 들려요. 특히 현악기가 고음을 연주할 때의 음색이 특이한데, 비브라토 탓이든 뭐든 뭔가 고주파에서 왜곡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녹음이야 그렇다 치고, 154-162마디의 묘한 아첼레란도. 이건 정말 최고예요! 여기서 나오는 하프의 음색도 상당히 생소하고 특이하게 들려요. 이 녹음,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참에 한 번 들어보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