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e (2018)

2021. 7. 2. 00:15문학과 예술/드라마·기타

사무실의 평소의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두 주인공.

얼마 전에 MIU404를 다 봤는데, 이 드라마를 켜고는 깜짝 놀랐어요. 익숙한 얼굴이 너무 많았거든요. 기동조사대 대장 키쿄 유즈루 역할을 맡았던 아소 쿠미코(麻生久美子) 배우 분은 여기서 '사카가미 법률 사무소'의 소장인 사카가미 마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말썽스러운 부하들을 솜씨 좋게 지휘해 내는 상급자 역할이 여기서도 잘 어울려요. 마시바 유타로는 천진난만한 얼굴과 능청맞은 태도 탓에 외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캐릭터인데요, MIU404에서는 일찍 얼굴을 비춘, '대놓고 악역'이었죠. 그 외에 첫 에피소드에서 야스오카 하루오를 찾다가 만난 그의 부인은 MIU404 제3화에서 학생들의 약물 사실을 감추려던 교장과 같은 배우이고, 제7화에서 범인으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은 사사모토 세이이치는 MIU404 제7화의 컨테이너 주민이기도 했어요. 제1화의 내부고발자를 연기한 에구치 노리코(江口のりこ) 배우 분은 한자와 나오키에서 시라이 의원 역할을 맡아 위풍당당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 줬죠.

그만큼 주연과 조연이 믿을 만한 배우로 가득한 캐스팅이었지만 결과가 너무 아쉬워요. 차라리 너무 별로라면 굳이 수고스레 짚을 필요도 없을 텐데, 여덟 시간 내내 조그마한 아쉬운 점들이 끊임 없이 쌓였어요. 드라마가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그 모든 기로에서 기대했던 것과 다른 길로 갔어요.

드라마가 다루는 주제는 굉장히 넓어서 저는 역사책이 떠올랐어요. 역사책은 시대를 건조하고 열화된 글로 박제해 전시하잖아요. 영상 기록물이나 유물처럼 생생하지는 않지만, 주제를 짚냐 빠뜨리냐의 차이가 크지요. 생전 장례식, 학교 폭력과 가스라이팅(사실 이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어요), 동성애, 황색 언론, 신약 개발, 20세기 일본의 과격파 학생운동이나 초능력자('에스퍼', 초능력(ESP)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er)) 파동 등, 뻔하지 않은 주제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찾았구나 싶은 다채로운 내용을 건드려요.

그렇지만 소재의 장점을 연출이 잘 살리지 못했어요. dele.life는 '망자와의 계약을 철저히 지킨다'라는 원칙을 가진 회사인데, 그 원칙을 어겨서만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게 일단 조심스럽습니다. 부적절한 건 아닌데, 적어도 그 원칙을 어기고 있다는 자각, 자각하고 있다는 표현은 꼭 필요하지요. "우리는 A를 하는 회사인데, 사실은 늘 B를 해."라고 한다면, A의 중요성은 금세 온데간데없게 되잖아요. 특히 그 A가 이렇게 무거운 주제, 인간의 근본과 맞닿아 있는 주제라면 결코 그 약속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됐어요. 데이터 삭제를 망설이는 순간 이미 망자, 그리고 살아 있는 우리가 지닌 인간성에 대한 질문은 던져진 상태이고, 제가 바라는 건 여기에 대해 최선을 다해 대답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드라마는 스릴러 수사물의 문법을 빌려 계약의 사정을 끝내 파헤치고 맙니다.

마지막 화에 즈음해서는 그나마 조금 고민을 하는 것 같습니다. 케이시가 평소 '파일을 열어 보지 않는 이유', 즉 알게 된 이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그 전에 하고요.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그려 내는 방식이 너무 일차원적이고 단순해서, 스릴러 수사물에 들인 노력과 질 높은 결과물이 무색해져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 명은 달아오른 감정을 앞세워 사건을 파헤치려 하고, 한 명은 언제부턴가 당연하다는 듯이 거기에 동조해 주죠. 케이시를 감정 없는 캐릭터로 그리고자 했다면 차라리 사이코패스와 같은 설정으로 쭉 가는게 나았겠어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타자화하는 그런 설정을 결코 좋아하지도 않는데도요. 사람 좋고 괜한 남 걱정을 해대는 마시바를 만나 점점 인정(人情)이 생기고 마음을 여는, 흔히 '츤데레'라 부르는 전개적 연출을 도입한 건 알겠어요. 근데 그걸 의도했는지 아닌지도 아리송할 만큼 케이시는 자주 타인과 그의 감정을 함부로 대하죠. 심지어는 다급한 순간에 늘어놓은 인정 없고 형편없는 자살 저지 설득을 '대단하다'며 포장하기도 해요.

에피소드 별로 아쉬운 점을 얘기하고 싶은데, 다음에 시간이 되면 이어서 적어 볼게요. 악담을 퍼붓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에요. 저도 한 번 돌이켜보고 싶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해서 MIU404의 이부키-시마 페어와 비교하게 됐어요. 어쩔 수 없단 말이에요. 이부키와 마시바의 능청댐이 막상막하라, 처음엔 정말 아야노 고와 동일 인물인 줄로 알았어요. 두 드라마 모두 거의 모든 에피소드마다 사망자가 나오지만, 죽음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선 차이가 커요. MIU404가 이로부터 2년 후에 방영된 드라마니, 여기서 필요한 교훈을 얻은 덕에 보다 멋진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면 좀 낫네요.

최고의 에피소드: 제1화, 제2화, 제5화
쓰고 보니 좋아하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번호와 비슷하네요. 고쳐 고른다면 요새는 2, 5, 7을 고르겠어요.
제1화는 연출과 연기, 각본 모두 짜임새가 탄탄했어요. 48분 안에 상당히 많은 주제를 잘 소화해내고 있어서, 완성도는 가장 높아요.
제2화는 접근이 좋았어요. "지우지 말아주세요"로 주제를 비틀어버리는 건 재밌죠. 시오리 부모는 식상하기 끝이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시오리의 인생의 궤적이 의미 있게 느껴지죠. "복수……." 하고 중얼거리는 것도, 드라마가 입체적인 생각을 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라 주목할 만 하죠.
제5화는 주제를 대놓고 언급하기가 무섭기라도 한 듯 상당히 완곡하게 연출하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엉엉 우는 걸 보고 적당히 눈짓으로 뭔가 깨달은 척 하는 거, 다시 생각해 보니 적잖이 모욕적인 것 같습니다. '동성애' 한 마디 하면 귀신이라도 나오나요. 다만 그 외의 연출, 전혀 모르는 사람과 하루를 보내는 풍경이 퍽 마음에 들었어요.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등골이 서늘해서 잠깐 마음을 놓았다간 온 세상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초조한 마음 말이죠.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길을 잃는 장면이 생각나요.

최악의 에피소드: 제4화
등장인물 모두에게 무책임한, 몹시 빈약한 마무리에요. 계약의 약속을 어겨도 어겨도 최악의 방식으로 어긴 느낌이에요. 게다가 초능력이라는 주제를 가져와서 겨우 이렇게 쓰다니요. 제가 초능력에 무슨 프라이드가 있는 게 아니라, 가져다 쓰기 시작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픽션으로 흘러가도 아무 말 못할 주제인 만큼, 기가 막히게 쓰던가 적어도 아껴서 써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니면 한여름 밤의 꿈같은, 귀신적이고 기이하지만 결국 그 잠깐새가 지나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에피소드로 끝내든가요. 인간이 넘지 못하는 벽을 잠깐이나마 딛고 올라섰을 때 다르게 보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건 평범한 수사물로 이미 충분히 그릴 수 있었어요. 이 에피소드에서 dele의 역할은 대체 뭐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