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 (1994)

2019. 5. 22. 22:44문학과 예술/영화

본인에게 옆자리에서 직접 듣는 이야기라 더욱 생생했을까요?

포레스트 검프는 발달 장애를 가진 어린 아이이다. 다리에 교정기를 차고 걷던 검프는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다가 달리기에 재능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재능 덕에 대학에 입학 및 졸업하고, 졸업식에서 입대를 제안받아 입대하게 된다.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고, 전쟁 중 우연히 엄청난 탁구의 재능을 찾아 결국 핑퐁 외교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가족이 새우잡이에 종사하던 전사한 전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대 후 새우잡이 배를 구입해 어업을 시작하고, 태풍에서 이 배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떼돈을 벌게 된다. 어머니의 병환 소식으로 고향에 돌아온 검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첫 친구였던 제니와 다시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제니가 떠나고, 검프는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한다. 3년동안 이어진 달리기 끝에 피곤하다며 집으로 돌아온 검프. 시간이 흐른 후 제니의 편지를 보고 그를 찾아간 검프는 자신의 아들을 만난다. 제니가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검프가 아들을 스쿨버스에 태우는 장면으로 영화는 맺는다.

 


 

글로 다 요약하지 못할 만큼 참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중심 사건이 있지는 않고, 검프의 일생의 여러 일을 그리는 영화였습니다. 여러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드라마였다면 그렇게 검프의 일상을 언제까지고 그려나갈 수 있었겠지요. 그런 드라마에서는 각각의 에피소드가 스토리를 가지고, 드라마 전반의 스토리는 배경과 캐릭터를 위해 필요합니다. 반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서사,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장면마다 변하는 것, 그리고 모든 장면을 관통하여 나타나는 것이 있겠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영화 전체에서 나타난 주제는 강한 의지, 끈질긴 생명력이었습니다.

검프는 주변의 일 대부분에 무덤덤해 보입니다. 입대 후 어머니가 보고 싶어도, 목숨이 오가는 폭격 속에서 친구를 잃어도, 두 다리를 잃고 비관에 빠져 엉망이 된 댄 중위를 만나도, 제니가 버스를 타고 떠날 때에도, 슬픔은 느끼지만 슬픔에 빠져 힘들어하고 흔들리는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미식축구 경기에서 터치다운을 하고 탁구로 국가대표가 되어도, 새우잡이로 떼돈을 벌어도, 댄 중위가 다시 갱생해 자신을 찾아왔을 때에도, 이 사람이 기쁘기는 한지 분간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너무 기뻐하지도 않고 너무 슬퍼하지도 않으며 검프는 삶의 모든 면을 견뎌냅니다. 그야말로 온갖 사건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꿋꿋하게요. 그런 꿋꿋한 모습은 영화의 어느 순간에도 빠지지 않고, 시간과 사건을 나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됩니다. 검프 어머니의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 (삶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20세기 미국사를 한 장면도 빼놓지 않고 발맞추어 나아갑니다. 여기에도, 여기에도 검프가 참가했단 말이야, 하는 놀람은 수없이 반복되면서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애매하게 인용하느니 오히려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주입했고 또 성공한, 영락없이 코미디 영화스러운 요소입니다. 반면에 어딘가 찜찜하다는 느낌은 혹시 안 드시나요? 억지로 집어넣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요. 어떤 캐릭터가 납득이 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완성된 서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사의 수많은 장면을 세세하게 끼워넣은 검프라는 캐릭터를 자연스럽지 않게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분재가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고 철사에 묶여 정해진 대로 이리저리 굽어나가며 자라듯이요.

그런데 어쩌면 부자연스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코미디 요소를 잠시 배제하고 볼까요. 시대 배경을 알려주고자 했다면 중간중간 라디오나 신문, 그리고 TV를 사용해 알려주거나, 검프의 내레이션을 삽입하면 됐을 일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검프가 온갖 사건을 넘나들며 역사를 바꿉니다. <닥터 후>에서 역사에 접근할 땐 그 내용이 에피소드 단위로 휴먼 드라마나 SF 중 하나로 귀결되고 시간 여행은 수단에 머무는데, <포레스트 검프>는 어떤가요? 훨씬 주도적인 역할로, 역사를 그야말로 써 나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검프는 어쩌면 여기서 검프가 아닌 셈이에요. 최고로 불린 앨러배마 대학교의 미식축구 선수들, 베트남전에 참전한 수백만 명의 미군, 핑퐁 외교로 공산 체제 중국을 미국인으로서 처음 방문한 아홉 명의 탁구 선수, 반전 시위에서 연설하는 군인, 달리기로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 검프는 그들 모두를 대신해 역사를 써내려가는 캐릭터이고 결국 이들을 상징합니다. 역사는 더이상 검프라는 두꺼운 책에 겹겹이 꽂힌 책갈피가 아니라 검프라는 책의 내용 그 자체입니다. 동시에 같은 시대를 겪어온 미국 사람들 모두가 가진 삶에 대한 의지, 힘든 일을 이뤄내며 역사를 쓴 자신들, 20세기 미국인 자체를 검프에 비추어볼 수 있습니다. <국제시장>이 이렇다고 많이 들었는데 아직 보지 못해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없네요.

 


 

검프는 그렇듯 상징적 인물이 됨과 동시에 주변적 인물이 됩니다. 검프는 가장 유명하지만 동시에 가장 일반적이고, 그래서 가장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정류장 옆 자리에 앉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검프를,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삼 년을 내리 달리기만 했던 인물을 알아보는 이가 없을까요? 영화 중반까지 검프는 꾸준히 제 이름은 포레스트, 포레스트 검프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정말로 검프라는 한 명의 사람을 분리해 보게 되기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댄 중위나 제시 같은 가까운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새로운 생각을 얻고, 검프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해갑니다. 끔찍했던 인생에서 스스로를 구원해내며 각자의 시간을 살아나가지요. 군인 검프, 탁구선수 검프, 달리는 농부 검프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을 거예요.

하지만 그동안 검프는 늘 주변적인 인물에 머무릅니다. 검프 자신의 이야기는 결국 제니와 연관해 시작합니다. 검프는 제니만큼은 완전히 놓지 못하고 계속 떠올리고 힘들어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제니의 방황을 멈추고 설득하고 사랑을 이야기하지는 못했습니다. 검프가 무작정 달리는 장면도 실은 앞뒤 맥락이 이어지지 않아 부자연스럽지만, 그 시간을 통해 영화가 검프 한 사람에게 초점을 옮겨 왔다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 당시에 모금을 위한 달리기가 붐이었는지도 모르겠고, 겸사겸사 smiley도 넣고 싶었을 수도 있고, 어린 포레스트가 클 때까지 영화 상의 시간을 벌어야 했을 수도 있고 하는 등 적당한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보다는 조금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온갖 사람들이 검프를 좇아 따라왔습니다. 검프로부터 희망을 얻고, 그의 의지를 느끼고 감화되었죠. 삼 년, 달리기로 치면 평생이나 다를 바 없이 느낄 삼 년 동안 검프를 따라온 이는 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검프는 자신을 따라오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드디어 집에 가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평생에 걸쳐 자신을 조명해 온 역사의 기록으로부터 이제야 벗어나는 거지요. 실은 늘 모든 게 그렇게 검프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거든요. 검프가 자신이 된다는 이야기에서 달리는 내내 줄곧 제니를 생각했다는 영화 속 대사도 겹쳐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제니도 참 20세기 영화다운 캐릭터네요.

 

다리를 잃은 댄 중위의 장면에서 어떤 특수 효과를 사용했는지 궁금했는데, 로토스코핑 등을 이용해 필름 단위로 편집을 거쳤다는 글이 있네요. 침대에서 떨어지는 등 동적인 장면도 있어 크로마 키도 아니었을 것 같았는데,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뉴스 속 장면들 역시 그런 방법으로 편집했다네요.

발달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그리는 방법은 '답답하지만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가장 간편하고 결국 나이브하겠습니다. <아이 엠 샘>은 어려운 주제를 너무 간편하게 다뤘다는 평이 기억에 남는데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그런 진지한 고려는 느껴지지 못했습니다. 우연이라면 우연으로 <아이 엠 샘>의 샘 역할을 맡은 숀 펜은 이 영화에서 제니 역을 맡은 로빈 라이트와 한동안 결혼했었네요.

stupid is as stupid does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handsome is as handsome does라는 표현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숙어의 어조는 얼굴이 잘생겨야 잘생긴 것이 아니라, 행동이 고와야 잘생긴 것이라는 표현으로, 외모가 아닌 행동을 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외모가 아닌 행동이 어정쩡함을 보고 묻는 사람에게 '행동이 바보같아야 바보이지요' 하고 대답하면 말 그대로 360˚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아무런 지혜도 없는 말을 한 셈이네요. 원래 표현을 알고 나서야 이해가 가서 덧붙여 적어 봤습니다.

검프도 그렇고, 댄 중위와 제니, 백인 요리사의 새우 요리를 즐기는 버바의 어머니까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도 느끼게 됩니다. 요즘 모든 작품에서 같은 느낌을 받네요.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하고 애틋한 시선. 이 영화는 그런 시선이 주가 되지는 않지요. 다음에는 그런 영화에 대한 글도 쓰고 싶습니다.
감상 후 열흘이 지난 이제야 마무리합니다. 글을 쓰는 게 참 오래 걸리는 일이구나 싶어요. 다음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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