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 비극>,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옮김

2019. 8. 19. 23:21문학과 예술/책

희랍의 비극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지칠 줄 모르는
탐구 정신에 힘입어 고대 희랍에서는
시와 노래와 춤과 웅변술을,
그리고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을 한데 묶은
종합 예술로서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대에 올려지고 읽혀지고
때로는 예술 작품들에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책 뒷면에 쓰인 글입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좋아하는 이유, 찾아 읽고 있는 이유도 꼭 이 글과 같습니다. 비극을 읽으면, 먼저 흔히 알고 있는 문학 작품의 하나로 느껴집니다. 무수히 많은 인과가 이야기의 앞뒤를 이어 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계속해서 상상하고 예측하며 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재가 되는 그리스 신화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알고 있는 만큼, 작품의 신화적 시점 그리고 각 인물에게 일어날 사건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스포일러가 되어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이 주는 재미가 없어지는 셈이지만, 이런 배경 지식은 오히려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인물이 겪어온 삶을 알고 그의 가치관과 태도를 안다면, 그 인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서린 의미가 더 깊게 와닿습니다. <트로이아의 여인들>에서 헤카베가 부르짖는 비탄의 노래는, "전에는 트로이아에서 통치자의 명예를 누렸던"(197행) 그가 트로이아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조국과 자식들과 남편을 잃은 처지"(107행)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한층 애절합니다. 또 인물의 선택과 발언이 가져오는 수많은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전지적 입장의 독자라면, 인물이 제아무리 생각을 해 결정을 내리더라도 피할 수 없이 찾아올 사건들에 대해, 결국 '필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기도 합니다. 필연은 때때로 '신의 의지'와 동일시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마침내 사건을 그리는 작가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는 모든 인물을 원하는 대로 부릴 수 있는, 그릴 수 있는 가장 전능한 주체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인물 하나하나를 작가는 구체화합니다.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하는지 이유를 붙여서 말이지요. 그리스 비극은 그런 이유를 자세히 그리고 직접 설명하는 데에 특히나 거리낌이 없습니다. "가련한 여인이여, 왜 그대는 나를 위하여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이오?" (중략) "나는 그대를 신과 같은 친구로 여기고 있어요. / 그대는 불행을 당한 나를 조롱하지 않았으니까요. / (중략) / 따라서 나는 그대가 더 쉽게 짊어질 수 있도록 / 힘닿는 데까지 자진하여 그대의 짐을 덜어 주고 / 그대와 노고를 같이하지 않으면 안 돼요." (<엘렉트라> 64-73행) 개개의 인물에 대한 사유뿐만 아니라, 사건을 조명하고 서술하는 방식 역시 생각의 여지가 넘쳐납니다. 제아무리 비열한 짓을 저지른 인물이라도 작중에서 또렷이 지적받기 전까지는 도덕적인 질문의 대상에 놓이지 않습니다. 사건의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부분만을 서술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와 같은 사건에 대한 작가의 태도 역시 조금 성급하게나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비극이라는 장르는 코로스 그리고 이야기를 매개할 조연 인물들이 필수이기 때문에, 이런 역할에 누구를 배치했는지 역시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그런 구체화의 개성 때문에, 자초지종을 아는 신화임에도 그 작품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작가의 해석 하나하나에 동의하고 반대하면서, 작가의 혹은 당대의 가치관을 알아가고 비판하는 등, 끊임없이 사고할 소재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 비극을 읽다 보면 어렵고 또 재미있는 화두를 끊임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주제를 찾는 연습, 떠올리고 발전시키는 연습이 필요하지요. 그러고 나면 세상의 수만 가지 작품, 그리고 작품이 아닌 모든 것에도 실은 골똘이 생각할 주제가 숨어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삼대 비극 작가로 불리는 에우리피데스는 '세속적'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과 얼추 어울립니다. 아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의, 고전적 의미로서 보다 '비극적'인 갈등과는 결이 다르지요. 신의 뜻에 의한 고난, 그 속에서 인물이 보이는 영웅적인 의지와 관철, 그로 말미암은 비극적인 결말이 저는 '고전적'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에우리피데스의 극에서 인물의 고통, 비극적 사건의 원인은 보다 덜 운명적이고, 더 인간적입니다. 에우리피데스가 그리는 신은 군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개입하며, 개개의 주체로서의 역할이 더 드러납니다. 조금 더 '인간적인 신'인 셈입니다.

메데이아

메데이아는 코린토스로 함께 쫓겨 온 뒤 그곳의 왕녀와 새로 결혼하려고 하는 이아손에게 복수합니다.

저는 이 극의 도입이 정말 좋아요. 차라리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하고 시작하는 한탄이 참 서정적이고, 그 한탄의 내용의 깊이는 아득히 깊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을 따지려 하면 수많은 우연과 필연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다는 사실만이 남잖아요. 인과로 얽힌 사건의 줄기를 뿌리까지 따라가서라도 이 모든 일을 부정하고 싶은 고통의 무게가 잘 전달되어서 좋았고, 극장에 앉은 관객을 데리고 이야기의 파도를 순식간에 통과해 어느새 중심 사건 한가운데에 도착하게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기술적인 솜씨도 좋게 느꼈습니다.

차라리 아르고 호가 검푸른 쉼플레가데스 바위들 사이를 지나
콜키스인들의 나라로 달려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펠리온 산의 골짜기에서 전나무가 도끼에 넘어져
펠리아스를 위하여 금양모피를 찾으러 간
가장 뛰어난 전사들의 팔을 위하여 노를 마련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 메데이아 마님은
이아손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이올코스 땅의 성채를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펠리아스의 딸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아버지를
죽이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금 이 곳 코린토스 땅에서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살지도 않았을 거예요.
(1-11행)

 

메데이아의 분노의 이유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봅니다. 메데이아는 결혼을 배신하고 몰래 새로운 사람과 결혼 계획까지 새운 이아손에 대해 분노합니다. 여기서의 감정은 또렷한 증오입니다. 만약 질투라 함은 이를테면, 이아손의 사랑을 빼앗긴 것이 분하고, 여전히 이아손을 좋아하는 채로 그 사랑을 다시 가져오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상상만 해도 너무나 일차원적이고, 끔찍하게 지루합니다. 메데이아의 태도는 그와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가족들에게 그토록 몹쓸짓을 해놓고 그 면전에 / 나타난다는 것은 용기도 아니고 대담성도 아녜요. / 아니, 그것은 인간의 모든 결함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 파렴치예요."(469-472행 일부) 이아손에게 그토록 헌신했던, 이아손을 위해 온 세상을 희생했던 메데이아인데, 그런 메데이아와의 맹세를 너무나도 가볍게 저버린 이아손에 대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실망하고 분노하며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인 결과입니다. 뒤따르는 대사도 쓰라립니다. "자, 그대가 아직도 내 친구인 양 내 그대에게 묻겠어요. / ―사실 그대에게서 내가 무슨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겠어요. 그러면 그대가 더 사악하게 보일 테니까― / 이제 나는 어디로 향해야 하나요?"(499-502행 일부) 크레온이 메데이아를 추방한다고 하니, 이아손 한 명만을 바라보고 먼 길을 온 메데이아는 이제 정말로 갈 곳이 없습니다. 이아손이야 크레온의 딸과 결혼해 무책임하고 안녕하게 살 생각일 테구요. 부부의 관계를 떠나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도 무뢰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이아손의 반박은 가만히 들어주기 힘듭니다. 대략 그 내용은, 메데이아 본인이 야만족의 나라(아시아의 다른 이름 수준으로 쓰입니다)를 떠나는 호의를 누렸으며 이아손 덕에 제 이름을 알렸다는 주장, 그리고 왕녀와의 결혼을 통해 메데이아가 낳은 아이들에게 왕족에 버금가는 지위를 주려고 했다는 변명, 메데이아가 혈혈단신으로 쫓겨나는 것은 메데이아 본인이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을 욕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걸작이지요. 물론 이아손의 말도 나름 논리적입니다. 세상에 변호하려고 들면 못 할 일은 없는걸요. 그중 납득 가능한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해명과 변명, 이 두 말을 따로 씁니다. 이아손의 어떤 점이 어떻게 틀렸다, 하는 것은 각자가 판단할 몫인 것 같습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직접 죽이지 않고, 둘 사이의 자식을 죽임으로서 복수합니다. 그 선택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뇌하지만, 아이들이 "더 증오심에 찬 다른 손에"(1238행)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나으며, 이아손에게 너무나도 큰 불행을 안겨줄 것임을 확신합니다. "얘들아, 아버지의 악덕이 너희들을 죽인 것이다!"(1364행) 이 역시 생각해 볼 만합니다. 불길에 휩싸여 왕과 왕녀를 잃은 코린토스에 이제 자식도 없는 이아손을 덩그러니 남겨두는 결말은 분명 이아손에게 큰 복수가 됐을 테지요. 그렇다면 왕녀도 충분히 죽임을 당할 만했을까요? 메데이아가 음모를 꾸민다는 소식을 듣고(282-291행) 그를 추방하려 한 왕도? 가장 죄 없는 아이들도? 그리고 "그건 조금 심했다"는 식으로 하나하나의 행동을 쳐내다 보면, 애초에 복수라는 것이 합당하기는 한가요? 반대로,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그 상황을 만든 이에게 복수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일까요? 이렇게 보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는 주제와 질문이 있는 걸 보면 2,500년 전의 사람이 쓴 문학 작품이라는 사실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는 듯합니다. 이 역시 비극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겠지요.

페미니즘 텍스트로서의 <메데이아>도 재미있습니다.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모든 것들 가운데 / 우리들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들이에요."(230-231행), "그들은 말하죠, 우리는 집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지만 / 자기들은 창을 들고 싸운다고. / 바보 같으니라고! 나는 한 번 아이를 낳느니 / 차라리 세 번 싸움터로 뛰어들고 싶어요."(248-251행), "여자는 다른 일에는 겁이 많고 싸움에 용기가 없고 / 칼을 보기를 무서워하지만, / 일단 결혼의 권리를 침해당하게 되면 / 그 어떤 마음도 더 탐욕스럽게 피를 갈망하지는 않을 거예요."(263-266행), "게다가 우리들 /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일에는 서투르지만 / 온갖 악한 일에는 가장 영리한 장인들이 아닌가!"(407-409행 일부), "아무도 나를 태만하고 허약하고 온순하다고 / 여겨서는 안 될 것이오. 오히려 그와는 달리 / 나는 원수들에게는 무섭지만 친구들에게는 상냥하단 말예요. /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야말로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마련이니까요."(807-810행), "(정말로 그대는 새장가 때문에 애들을 죽이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 그대는 그게 여자에게 적은 고통이라고 생각하세요?"(1367-1368행) 등을 읽다 보면 놀랍습니다. 여성은 어떻고, 남성은 어떻다 하는 전통적 가치관에 일견 부합하는 듯한 대사와 함께, 그런 성 역할과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인간 메데이아의 대사가 섞여 있기 때문이에요.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의 안티고네나 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 <엘렉트라>의 엘렉트라도 인상적이지만, 끝내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아손을 저주하며 멀리 날아오르는 메데이아의 모습은 비극적인 슬픔과 동시에 복수의, 승리의 쾌감이 느껴집니다. 모순적이고, 복잡하지요. 그래서 가장 재미있습니다.

영리한 사람은 태만하다는 말을 듣지만 또 동시에 미움과 시기를 산다는 내용(292-304행)이 에우리피데스 본인의 처지를 가리킨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사악하고 교활하다는 악명을 내내 달고 살았던 메데이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만하지 않나 싶네요.


히폴뤼토스


알케스티스


헬레네


트로이아의 여인들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박코스의 여신도들


퀴클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