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박스 Bird Box (2018)

2019. 5. 24. 23:07문학과 예술/영화

전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정체 모를 어떤 존재의 모습을 본 사람은 모두가 즉시 자살에 이르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모든 시스템이 무너지며 도로는 사고 난 차로 가득해졌다. 출산을 앞둔 주인공 말로리는 재난 속에서 가까운 집으로 피난해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목숨을 건졌다. 생면부지인 이들은 생존을 위해 나름 힘을 합쳐 모든 창문을 가리고 집 안에 틀어박힌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부와의 접촉으로 몇몇을 잃기도 하고 차를 훔쳐 떠나기도 하며 팀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은 이 존재를 보고 나서 자살은 커녕 외려 경탄하며 주변 이들에게 이를 보이려고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어느 날 이 집의 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외부인 역시 연기(演技)로 그런 면모를 감추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말로리와 톰,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 둘만은 살아남는다. 둘은 안대를 하고 근처를 수색하며 물자를 구해 함께 두 아이를 키운다. 아이들이 다 클 무렵 이들은 강을 타고 내려오면 급류 근처에 안전한 곳이 있다는 소식을 무전으로 듣는다. 식량이 떨어져 가는 중에 다시 정신 질환 보유자의 습격으로 톰이 사망하고, 말로리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강을 내려간다. 급류를 무사히 빠져나오고 귓속에 속삭이는 수많은 목소리를 이겨낸 끝에 도착한 릭의 집은 옛 시각 장애인 학교였으며 이곳은 외부로부터 단절되고 완벽히 안전한, 드디어 도달한 영원의 안식처였다.

 


 

결국 멸망을 불러온 '존재'의 형상이나 원리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담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멈추는 날> 같은 작품이 SF로 분류되는 걸 생각하면 <버드 박스>는 SF와는 크게 거리를 두지요. '존재'가 아닌 그 반대편, 즉 재난에 맞서는 모습이 바로 영화의 내용입니다. 미지의 존재의 위협으로 인해 시종일관 호러의 성격을 띄는 이 영화는 그때문에 동시에 재난 영화가 됩니다. <미스트>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보니 둘 다 소설 원작이기도 하네요.

더글라스의 집에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며 뚝딱 팀이 꾸려지지만 이들이 힘을 합쳐 재난에 맞서냐 하면 또 그렇지도 못합니다. 처음부터 균열을 가지고 있던 이 이상한 팀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래 가지 못하고 천천히 무너집니다. 한 명 한 명이 리타이어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주인공이자 마지막 생존자 말로리에게로 시선이 모입니다.

말로리는 다가올 출산에 끝까지 부정적이었습니다. 의사의 진찰 중 임신을 직접 언급하기 꺼려 '증상(condition)'이라고 가리키는 말로리라는 캐릭터는 낯설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익숙한 하나의 목소리를 대변하지요. 모든 임부가 아이를  소중히 여기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비록 힘들지만 뿌듯하고 기쁘고 성스럽게 여길 거라는 믿음에 대해 당당하게 아니오를 외칩니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대체 언제부터 여성을 괴롭혀 왔는지도 모를 만큼 참 오래 된 믿음입니다. 이제 바뀔 때도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낯설지만 익숙하고 그래서 반가운 캐릭터였습니다.

재난 영화라면 으레 가장 수동적이고 약하게 그리던 임산부가 <버드 박스>에서는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인공이 되어 결국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샌드라 불럭의 연기도 그 모든 장면을 훌륭하게 채웠구요. 말로리가 끝내 아이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변화의 장면이 영화의 절정입니다. 바로 그 덕분에 영화는 거의 완전한 해피 엔딩으로 맺습니다. 아이들이 찾아오지 못했다든가, 릭의 시설이 함정이었다든가 했다면 곧바로 비극이 됐겠지요. 그랬다면 아이를 잃었음에 고통스러워 하는 말로리가 영화의 마지막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신 <버드 박스>는 말로리에게 이름도 없는 두 아이를 안겨주고, 말로리도 끝내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쉽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지 모르겠어요. 기껏 해봐야 결론이 구닥다리 모성애 코드라니! 하고 느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다만 이런 캐릭터는 저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세운 틀 안에 갇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과 내용이 익숙한 결론으로 수렴한다는 점 중 '더 옳은' 쪽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정신 질환자와 시각 장애인을 소재적으로 소비하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어차피 정체를 알려주지 않을 거라면 이런 설정은 정말 어떻게도 할 수 있잖아요.

안대 안에서의 영상은 잊을 수가 없지요. 이 화면이 주는 정보는 기계적으로 말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데 이것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무서운 장면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 너머에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압니다. 이 장면에서 느끼는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느끼는 공포. 이 말을 곱씹어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느끼는 공포와 똑같은 셈이네요. 그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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