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제5번, op. 67; 테오도르 쿠렌치스, 무지카에테르나

2020. 12. 26. 11:50문학과 예술/음악

지휘자는 테오도르 쿠렌치스 (Teodor Currentzis), 오케스트라는 무지카에테르나(MusicAeterna)입니다. 발매일이 2020년 4월 3일로 나와 있는 앨범입니다.

앨범 표지. 흰 바탕에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5-TEODOR CURRENTZIS MUSIC AETERNA라는 회식 글씨를 불규칙한 줄바꿈으로 늘어놓았습니다. NO 5에는 빨간 색을 입혔습니다.

일반적인 440㎐보다 반의반음(half-semitone)정도 낮은 조율을 사용합니다. 시대 연주의 목적인가봐요. 반의반 음의 차이가 음색을 확연히 바꿔 줘요. 베토벤 5번의 다른 시대 연주 음반은 못 들어봤는데, 다른 시대 연주 음악에서는 아예 반음(1 semitone)까지 낮은 415 Hz로 조율하는 경우도 본 것 같아요.

1악장이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라요. 박자가 너무 빨라! 이것도 원전에 충실한 연주의 특징일 거예요. 베토벤이 악보에 기보한 메트로놈 마킹 수치를 충실히 따른 거죠. 어떤 연구자들은 베토벤의 메트로놈 기보에 문제가 산적해 있다고 보고 연구하기도 하죠. 당대의 1초의 기준이나 메트로놈 설계의 공학적 문제 등을 따져 보니 현대에 해석한 박자와 차이가 크더라는 얘기를 몇 번 읽었어요. 또 기보 실수도 있구요. 교향곡 제9번 4악장 중 행진곡 풍 변주인 allegro assai vivace. alla marcia 부분의 템포 마킹이 베토벤의 실수로 2배 느리게 되어 있었다고 하죠. 아무튼 한 마디에 108(이분음표=108)의 마킹을 거의 정확히 따라갑니다. 앨범 몇 개를 비교해 봤는데 카라얀 100, 푸르트뱅글러 92, 그리고 확실히 느린 편으로 느꼈던 스토코프스키는 85정도가 되네요. 물론 같은 지휘자라도 오케스트라나 앨범에 따라 속도가 크게 달라지기도 하니 그냥 참고만 해 주세요.

루바토(템포의 단기간에 걸친 변화)를 자유로이 기용해 극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일은 적어도 이 연주에서는 잘 없습니다. 1악장에서 G-G-G 뒤의 E♭과 D에 붙는 페르마타는 정말 예의 상 하는 척만 해 주고 넘어갑니다. 템포 변화는 기껏해야 268마디의 오보에 솔로 직전에 잠깐 느려지는 게 있구요. 2악장에서는 기보된 8분음표=92보단 살짝 느리지만 너무 천천하지는 않은, '걷는 듯한' Andante에 알맞은 속도였어요. 너무 천천히 걸으면 발이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니까요. 목관이 멜로디를 할 땐 박자도 좀 더 여유롭게 써서 돌체(dolce, 부드럽게)의 느낌을 아름답게 살려요. 3악장에선 포코 리타르단도(poco rit., 조금 느려지며)와 아 템포(a tempo, 원래 속도로)가 가져 오는 대비를 잘 그렸고, 트리오는 또 숨막히게 빨라요! 여기는 in 1 박자가 90이네요. 다른 앨범을 살펴 보면 보통 82 정도로 모는 것 같아요.

빠르게 몰고자 하는 지휘자는 많지만 그게 매번 유효하지는 못해요. 빠른 템포의 눈에 띄는 부작용으로 뭉개짐이 있어요. 특히 울림이 심한 공연장이나 녹음실일 수록 이 영향이 커요. 빠르게 맥동하려는 음파 사이사이 아주 잠깐의 틈에 벽에 부딪혀 돌아온 낡은 음파가 끼어들면서, 낱개 음의 선명함은 사라지고 '웅성웅성하고 무언가 음악적 사건이 벌어지고는 있다' 정도를 전달하는 데에 그칩니다. 또 다른 부작용은 엇갈림입니다. 금관이 스타카토를 한다든지, 현악이 까다로운 손 포지션에 몰린다든지 하면 파트끼리 순간 엇갈리는 경우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금관의 어택이 현악보다 늦게 터지는 경우가 많죠. 완벽한 군무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성급하게 몰다가 오케스트라 내에서 박자가 나갈 땐 아쉬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이 앨범에서 놀란 점도 그거였어요. 빠른 구간을 모두 선명하고 예쁘게 표현했다는 점이요. 현악에서 눈에 띄는 건 모든 음을 스포르잔도 혹은 스타카토처럼 긋는 거예요.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완벽한 군무! 지휘자를 정면으로 응시라도 하는 걸까요? 열 명 이상이 같은 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현악은 음색이 둥글고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각 음의 시작과 끝이 불명확해지잖아요. 이 오케스트라는 무한한 연습으로 정확한 타이밍을 커버한 걸까요? 사람 수가 적은 챔버 오케스트라에선 이런 역동적인 현악 소리가 나지만, 반대로 음정이 불안하고 비브라토가 너무 날것으로 들리기도 하지요. 실제로 사람을 좀 줄였을 가능성도 있겠어요. 어떤 원전 연주 연구가는 베토벤의 오케스트라를 훨씬 작게 본다고 들었어요. 베토벤이 교향곡을 한껏 발전시켰고 그 덕에 뒤따른 낭만주의 음악에서 오케스트라가 한없이 커졌으니, 베토벤 대에는 많아야 50명이나 됐을 거라는 논지였을 거예요.

아무튼 그런 훌륭한 타이밍에 더불어 녹음 장소도 굉장히 건조합니다. 반향이 적다는 말이에요. 1악장 56, 58마디에 터뜨린 음표가 음반의 35초 그리고 1분 54초 부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잠깐동안 선명하게 남아있다가 즉시 사라지는 게 신기해요. 반향은 후처리 작업 중에 넣기도 한다던데, 했다면 오히려 줄이는 쪽으로 후처리를 했대야 믿겠어요. 팀파니 소리도 상당히 빨리 사라지는데 이건 연주자의 연주 기술도 들어가겠죠. 현악의 짧은 서스테인은 비단 빠른 패시지에 한정되지 않고 곡 전반에 나타나요. 날카롭게 벼린 집중력이 네 악장, 30분 내내 유지하는 게 정말 놀라울 정도예요.


세밀한 부분에도 많은 신경을 쓴 게 잘 느껴져요. 1악장 79-82마디(51초, 2분 8초)같은 곳의 표현은 정말 예쁘지 않나요? 마디별 분절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크레셴도-데크레셴도, 두 마디를 잇는 슬러, 그리고 앞 소절에서부터 이어지는 작은 크레셴도 프레이징. 2악장 59-64마디(2분 3초)의 목관 소리도 정말 정성 들여 깎은 것 같아요. 클라리넷 소리는 귀를 울리는 공간감을 주고, 오보에가 멜로디를 연주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뒤에서 화성을 받치고 있어요. 고작 3초 남짓한 시간인데 네 마디의 표현, 개성이 각기 너무나도 달라요.

3악장 184, 186마디(2분 27초)의 스포르잔도도 선명해요. 3악장 270마디(3분 33초)부터는 sempre pianissimo(항상 아주 여리게)로 기보되어 있지만 연주에서는 뒤따르는 프레이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요. 4악장 34마디(1분 28초, 3분 27초)의 포르테피아노(세게 연주하고 즉시 여려지게)는 아기자기한 느낌이 살아서 귀엽고 좋아요. 4악장 후반의 반종지(half-cadence) 이후엔 322마디(8분 48초)와 같은 음형 패턴이 계속 나오는데, 관현악을 막론하고 점8분음표를 가볍게 끊어주고 있어요. 이것도 사소하게 귀엽고 좋아요. 패턴이 반복되는데 전부 슬러로 이어져 있으면 질리니까, 정박이 아닌 곳에서 끊어준 것 같아요. 4악장 362마디 Presto(9분 36초) 앞에서 조금 급하게 빨라지긴 하는데, Presto의 온음표=112 마킹은 서두르지 않고는 도무지 처리할 수 없겠죠.

1악장 303마디(재현부의 GGG-C-D-G) 프레이즈, 바순인가 호른인가에 관한 유명한 문제가 있어요. 이 녹음에서는 4분 35초에 나오고, 7분 30초 남짓 되는 녹음에서는 5분 즈음에 나와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해요. 베토벤은 이 여섯 개의 음표를 바순에게 맡겼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호른(1악장에서 E♭)에게 주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는 호른에게 맡겨야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베토벤이 몰랐을 리가 없다, 4악장에서 C 호른도 나온다, 코다 앞 재현부를 억눌러주고 색다른 변화를 가져오는 등 다분히 음악적 효과가 있다는 주장에 바탕해 바순을 선호합니다. 원전 연주스러운 녹음답게, 여기서는 바순을 택했네요.

 

악보를 현미경으로 읽은 듯한 세공,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몰아치는 군무 같은 공세. 이 곡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잘 해낸 건 처음 같아요. 같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말러 교향곡 제6번 연주에서 박력, 그리고 셈여림의 커다란 차이로 만드는 공간감 같은 걸 느꼈던 것과 비교하면 또 사뭇 다르네요.